이미지 확대보기반도체 미세 공정이 나노미터(nm) 단위의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ASML은 대체 불가능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른바 '슈퍼 을(乙)'로 불리는 이 기업의 장비가 없으면 최고 사양의 AI 칩도, 스마트폰의 브레인인 AP도 생산할 수 없다. 시가총액 기준으로 유럽 최대 기술 기업의 반열에 오른 ASML의 혁신과 독점의 역사는 반도체 패권의 흐름 그 자체다. ASML의 출발은 미미했다. 1984년 네덜란드의 가전 거인 필립스(Philips)와 반도체 장비 제조사 ASM 인터내셔널의 합작 투자로 설립되었다. 당시 연구실은 네덜란드 동남부 아이트호벤(Eindhoven)에 위치한 필립스 본사 건물의 뒤뜰에 처박힌 허름한 판자촌 형태였다.
그 당시 글로벌 노광 장비 시장의 절대 강자는 일본의 니콘(Nikon)과 캐논(Canon)이었다. 후발 주자였던 ASML은 만성적인 자금 난과 기술적 한계에 부딪히며 파산 위기를 겪었다. 모태가 된 필립스의 광학 기술적 유산과 연구원들의 집요함이 위기극목의 모멘텀이 됏다. 필립스가 축적해 온 세계 최고 수준의 렌즈 설계 및 제어 기술은 ASML에 고스란히 이식되었다. 이후 ASML은 생산 기지를 아이트호벤 인근의 펠트호벤으로 확장하며 독자적인 미세 공정 레이저 기술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일본 기업들이 기존 기술의 연장에 안주할 때, ASML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차세대 광원 연구에 사활을 걸며 대역전극의 서막을 열었다.
반도체의 성능은 머리카락 수만 분의 일 굵기의 실리콘 웨이퍼 위에 얼마나 많은 회로를 정밀하게 그려 넣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빛으로 회로를 찍어내는 공정을 노광(Lithography)이라 부르는데, ASML은 이 분야에서 신의 경지에 올랐다. ASML 독점력의 핵심은 극자외선(EUV, Extreme Ultraviolet) 노광 장비다. 기존 불화아르곤(ArF) 액침 장비의 광원 파장이 193나노미터였던 것에 반해, EUV는 13.5나노미터로 훨씬 짧다.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웨이퍼에 더 얇고 세밀한 회로를 그릴 수 있다.
이 기술은 단순한 장비 제조를 넘어선 물리학적 극한의 도전이었다. 극자외선은 자연계의 모든 물질, 심지어 공기조차 흡수해 버리는 성질이 있어 고진공 상태에서 특수 거울을 이용해 빛을 반사하는 복잡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ASML은 거울 광학의 권위자인 독일 자이스(Zeiss) 등 글로벌 강자들과 독점적 생태계를 구축하여 20여 년간 수십조 원을 투입한 끝에 세계 최초로 EUV 상용화에 성공했다. 최근에는 2나노미터 이하 초미세 공정을 가능하게 하는 차세대 장비인 '하이 NA(High NA) EUV'까지 독점 공급하며 기술 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다. 대당 가격이 수천억 원을 호가하는 이 장비는 글로벌 파운드리 기업들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다.
ASML이 EUV라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시장의 시선은 회의적이었다. 천문학적인 개발비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이때 ASML을 구원하고 오늘날의 동반자 관계를 형성한 핵심 주역들이 바로 삼성전자와 TSMC다. 2012년 ASML은 자금 확보와 위험 분산을 위해 주요 고객사들을 대상으로 지분 참여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당시 글로벌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은 핵심 기업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만의 TSMC는 약 5%의 지분을 인수하며 미세 공정 리더십을 강화했고, 대한민국의 삼성전자 역시 약 7,000억 원을 투자해 지분 3.0%를 확보했다. 미국의 인텔 또한 15%의 지분을 사들였다.
이 투자는 역사적인 '신의 한 수'가 되었다. ASML은 안정적인 개발 자금을 확보해 EUV 시장을 완전히 독점했고, 투자 기업들은 장비 우선 공급권이라는 막대한 전략적 이득을 취했다. 비록 삼성전자가 이후 반도체 투자 재원 확보 등을 이유로 ASML 지분을 점진적으로 매각하여 현재는 보유 지분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과거의 지분 동맹은 삼성이 파운드리 및 첨단 D램 공정에서 격차를 유지하는 핵심 발판이 되었다. TSMC 역시 이 동맹을 바탕으로 파운드리 세계 1위 왕좌를 굳혔다. ASML의 압도적인 기술력은 지정학적 폭풍의 한가운데로 이 기업을 이끌고 들어갔다. 조 바이든 행정부에 이어 출범한 미국 행정부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저지하기 위해 공급망 차단 전략을 구사하고 있으며, 그 최전선에 ASML의 장비를 배치했다.
미국 정부는 네덜란드 정부와의 공조를 통해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EUV 장비의 중국 수출을 전면 차단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구형 공정에 쓰이는 심자외선(DUV) 장비 중 일부 상위 모델까지 규제 대상을 확대했다. 중국의 대형 파운드리 기업인 SMIC나 메모리 업체들이 천문학적인 자금을 들고 와도 ASML은 장비를 판매할 수 없는 구조적 족쇄에 갇혔다.중국은 규제가 본격화되기 전 구형 DUV 장비를 대거 사들이며 저항했으나, 첨단 인공지능 칩 생산을 위한 7나노미터 이하 공정 진입은 ASML의 첨단 장비 없이 불가능에 가깝다. ASML 입장에서는 거대 시장인 중국 매출의 일부를 포기해야 하는 리스크를 안게 되었으나, 미국 주도의 글로벌 반도체 통제 메커니즘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ASML은 네덜란드 아이트호벤의 판자촌에서 출발해 세계 첨단 산업의 생태계를 지배하는 거인으로 우뚝 섰다. 필립스의 기술적 뿌리 위에서 피어난 극자외선(EUV) 독점력은 대체 불가능한 무기가 되었고, 삼성전자와 TSMC 등 글로벌 파운드리 거인들과의 지분 동맹은 이들의 지위를 한층 더 공고히 만들었다. 첨단 기술의 독점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무기화를 동반한다. 미·중 패권 경쟁의 심화 속에서 ASML의 장비는 단순한 산업재를 넘어 한 국가의 첨단 군사·안보 역량을 좌우하는 전략 물자가 되었다. 기술 초격차를 통해 최고 권력에 오른 ASML이 앞으로 다가올 지정학적 대격변의 파고 속에서 어떻게 '슈퍼 을'의 지위를 유지해 나갈지, 글로벌 거시 경제의 향방을 가를 핵심 관전 포인트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