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만으로는 AI가 구동되지 않는다
이미지 확대보기브로드컴은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기업은 아니다. 일반 소비자가 브로드컴의 로고가 박힌 완제품을 상점에서 구매할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현대 인류 중 브로드컴의 기술을 단 하루도 거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휴대하는 스마트폰의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칩셋부터, 매일 접속하는 구글과 유튜브의 데이터센터 내부를 흐르는 고속 데이터 트래픽의 길목마다 브로드컴의 실리콘 칩이 파수꾼처럼 버티고 서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 이르러 브로드컴의 위상은 한층 더 독보적인 위치로 격상되었다. 엔비디아의 GPU가 아무리 뛰어난 연산 능력을 자랑하더라도, 그 수만 개의 칩을 하나로 묶어 거대한 '하나의 두뇌'로 작동시키는 고속 네트워크 가속기와 맞춤형 반도체(ASIC) 시장은 브로드컴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인공지능 모델이 고도화될수록 필요한 데이터의 양과 연산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오픈AI의 GPT 시리즈나 구글의 제미나이(Gemini) 같은 거대언어모델(LLM)을 학습시키기 위해서는 단 한 대의 컴퓨터나 몇 개의 GPU로는 불가능하다. 수만 대에서 수십만 대의 GPU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동시다발적인 연산을 수행하는 '초거대 AI 클러스터'가 필수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브로드컴의 진가가 드러난다.아무리 연산 속도가 빠른 GPU라 할지라도, 칩과 칩 사이를 연결하는 데이터 고속도로가 막히면 전체 시스템의 효율은 급격히 떨어진다. 반도체 공학에서는 이를 '네트워크 병목 현상'이라 부른다.
브로드컴은 데이터 고속도로의 인터페이스를 설계하고 제어하는 스위치(Switch) 및 라우터(Router) 칩 분야에서 전 세계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독점적 지배자다. 대표적인 제품군인 '토마호크(Tomahawk)'와 '제리코(Jericho)' 시리즈는 데이터센터 내부의 트래픽을 빛의 속도로 분산하고 제어하는 핵심 하드웨어다. 엔비디아가 자사의 독자 규격인 '인피니밴드(InfiniBand)'를 앞세워 네트워크 시장까지 삼키려 하자, 브로드컴은 구글, 메타, AMD 등과 손잡고 개방형 표준인 '울트라 이더넷 컨소시엄(UEC)'을 주도하며 엔비디아의 독주를 견제하는 거대한 축을 형성하였다. 빅테크 기업들 입장에서는 엔비디아의 폐쇄적 생태계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브로드컴의 초고속 이더넷 기술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브로드컴의 또 다른 강력한 성장 엔진은 맞춤형 주문형 반도체(ASIC, Application-Specific Integrated Circuit) 사업이다. 엔비디아가 만드는 GPU는 그래픽 연산부터 자율주행, AI 학습까지 두루 쓸 수 있는 '범용 칩'이다. 반면 ASIC은 특정 기업의 특정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에만 100% 최적화하여 극단적인 가성비와 전력 효율을 뽑아내도록 설계된 '특화 칩'이다. 엔비디아의 GPU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공급 부족 사태가 장기화되자, 막대한 자금력을 갖춘 빅테크 기업들은 자체 AI 반도체를 설계하여 엔비디아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비밀 작전을 현실로 구현해 준 설계 파트너가 바로 브로드컴이다.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바로 구글의 TPU(Tensor Processing Unit)다. 구글은 AI 인공지능 연산의 핵심인 행렬 곱셈을 멈춤 없이 처리하기 위해 인간의 심장이 피를 순환시키는 구조를 모방한 '시스톨릭 어레이(Systolic Array)' 아키텍처를 고안했다. 그러나 구글이 아무리 뛰어난 소프트웨어와 개념적 구조를 설계하더라도, 이를 실제 실리콘 웨이퍼 위에 구현하고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배치하는 하드웨어 엔지니어링은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다. 브로드컴은 자신들이 보유한 독보적인 초고속 데이터 전송 기술(SerDes) IP와 메모리 컨트롤러 기술을 제공하여 구글의 아이디어를 세계 최고의 AI 칩으로 탄생시켰다. 최근 구글과 브로드컴이 최장 2031년까지 차세대 TPU를 공동 개발 및 공급하기로 장기 계약(LTA)을 맺은 것은 두 회사의 결속력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구글뿐만 아니라 메타(Meta)의 자체 AI 칩인 'MTIA' 프로젝트, 틱톡의 모기업 바이트댄스의 AI 칩 설계 역시 브로드컴의 손을 거치고 있다. 빅테크들이 엔비디아의 대항마를 키울 때마다 브로드컴의 금고에는 막대한 설계 수수료와 칩 공급 대금이 쌓이는 셈이다.
오늘날 브로드컴이 지닌 독점적 지위와 가공할 만한 수익성의 배경에는 CEO 혹 탄(Hock Tan)의 놀라운 경영이 자리 잡고 있다. 말레이시아 출신의 이민자로서 MIT와 하버드 MBA를 졸업한 혹 탄은 반도체를 단순한 공학적 예술품이 아닌, 철저한 금융적 관점과 독점적 비즈니스 모델로 바라본 인물이다. 그가 이끄는 브로드컴의 역사 자체가 글로벌 반도체 역사상 가장 공격적이고 잔혹한 인수합병(M&A)의 연속이었다.본래 혹 탄이 이끌던 회사는 소형 반도체 기업인 아바고(Avago)였다. 그러나 아바고는 2015년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컸던 원조 통신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을 370억 달러에 집어삼키는 '새우가 고래를 삼킨 M&A'를 단행하였다. 그 사명 마저 브로드컴으로 바꿨다.
혹 탄의 식탐은 멈추지 않았다. 브로케이드, CA테크놀로지스, 시만텍의 보안 부문을 차례로 인수하더니, 최근에는 거대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기업인 VM웨어를 690억 달러에 인수하는 초대형 빅딜을 완결 지었다. 혹 탄의 M&A 공식은 명확하고 냉정하다. 시장에서 대체 불가능한 독점적 기술을 가진 기업을 인수한 뒤, 핵심 자산만 남기고 비주력 부문은 즉각 매각하거나 구조조정한다. 그리고 남은 핵심 제품의 가격을 대폭 인상하여 마진을 극대화한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를 두고 '브로드컴화(Broadcomization)'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고객사들이 반발하더라도 대체재가 없기 때문에 브로드컴이 요구하는 가격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철저한 공급자 우위 시장 구조를 기반으로 브로드컴은 반도체 기업 중 최고 수준인 60% 이상의 매출총이익률(Gross Margin)을 유지하며 시장에서 '통행세 거두는 거인'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처럼 완벽해 보이는 독점 체제 속에서도 브로드컴은 글로벌 금융 시장의 비이성적인 탐욕과 그로 인한 변동성이라는 성장통을 겪고 있다. 최근 브로드컴의 실적 발표 사태는 인공지능 거품론과 시장의 과도한 기대감이 어떻게 기업 가치를 왜곡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당시 브로드컴은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하고, AI 관련 부문에서만 전년 대비 140%가 넘는 경이로운 성장세를 증명해 보였다. 가치사슬의 견고함과 펀더멘털에는 아무런 균열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적 발표 직후 브로드컴의 주가는 도리어 폭락하는 기현상이 발생하였다.
그 원인은 월가의 기관 투자자들이 은밀하게 기대치를 높여 잡았던 이른바 '위스퍼 넘버(Whisper Number)'의 함정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시장 전망치(Consensus)는 가볍게 뛰어넘었으나, AI 열풍에 눈이 먼 시장의 극단적인 탐욕론자들은 더 파괴적인 수치와 마진율 상승을 기대했던 것이다. 반도체 미세 공정 전환에 따른 일시적인 비용 증가와 VM웨어 인수에 따른 초기 통합 비용으로 인해 마진율이 미세하게 둔화될 것이라는 가이던스가 나오자, 시장은 즉각 실망 매물을 쏟아냈다. 브로드컴의 실질적 기술 가치에 문제가 생겨서가 아니라, 주가가 '완벽함 그 이상'을 담보로 조형되어 있을 때 금융 시장이 들이대는 비이성적인 잣대의 한 단면이다. 혹 탄의 차가운 숫자 경영조차 월가의 뜨거운 투기적 열망을 매 순간 완벽히 만족시키기는 어렵다는 경제학적 교훈을 남겼다.
브로드컴의 독주 체제와 인프라 지배력은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거인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도 강력한 연쇄 효과를 미친다. 구글과 브로드컴이 연합하여 자체 TPU 생산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메타와 아마존이 ASIC 도입을 가속화할수록 그 칩 내부의 연산을 보조할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수요 역시 비례해서 폭발하기 때문이다. 브로드컴이 차세대 AI 가속기 설계를 위해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진영과 고속 인터페이스 규격을 긴밀히 조율하고 있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젠슨 황의 엔비디아가 화려한 칼춤을 추며 천하를 통일한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그 무대 밑바닥에서 빅테크들의 반도체 독립 의지를 자양분 삼아 자신들만의 견고한 네트워크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혹 탄과 브로드컴의 연합군은 엔비디아의 제국을 위협하는 가장 거대하고 실질적인 벽이도 하다. 반도체 전쟁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칩의 성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칩과 칩을 잇는 보이지 않는 연결 통로를 누가 지배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브로드컴은 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