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자연은 향기로 시절을 일러준다. 아침마다 창문을 열면 산을 내려온 알싸한 밤꽃 향기가 코를 찌른다. 유월은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이자 밤꽃 향기의 계절이다. 시인의 말처럼 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는 그리움을 자아낸다. 특히 밤꽃 향기는 한 번 맡으면 머리에 어질병이 일 만큼 짙고 강해 향기라는 말보다는 냄새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하다.
조선 시대 유학자 서거정이 ‘동국여지승람’에서 6월 전국의 산야를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뒤덮은 밤꽃을 “눈송이 같은 밤꽃 향기 물씬물씬 풍기더니 주렁주렁 달린 밤송이 수많은 별 같구나(栗花如雪 香浮浮, 疊疊結子 如繁星)”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밤꽃은 예나 지금이나 온 산천에 흐드러져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밤나무는 보통 심은 지 3년이 되면 수확할 수 있어 일찍부터 우리에게 무척이나 친근한 나무다. 암수한그루인 밤나무의 꽃은 털실처럼 부숭부숭하고 길게 늘어진 것이 수꽃이고, 암꽃은 수꽃 꽃차례 바로 밑에 세 개씩 달리는데 볼품이 없고 향기도 없다.
흔히 밤꽃 향기를 남성의 향기라고 한다. 예전에는 밤꽃 냄새를 양향(陽香)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밤꽃 향기가 남성의 정액 냄새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밤꽃과 정액 속엔 공통적으로 스퍼미딘(spermidine)과 스퍼민(spermine)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독특한 향을 발산하는 것이다. 밤꽃 향기는 특이하게도 수꽃에서 난다. 감꽃이나 호박꽃과 같이 암꽃과 수꽃이 별개인 경우, 보통은 암꽃이 크고 향기 또한 수꽃보다 진하다. 그러나 밤꽃은 수꽃이 더 화려하고 향기 또한 진하다. 밤꽃 향기는 벌들을 유인해 불러들이고 밤꽃은 찾아온 벌들에게 충분한 꿀을 제공해줘 밤나무 아래 서면 꿀을 빠는 벌들의 붕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여간 소란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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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일찍이 이호우 시인은 “살구꽃 핀 마을은 다 고향 같다”라고 노래한 적이 있지만 내겐 ‘밤꽃 핀 마을’은 다 고향처럼 느껴진다. 내 어릴 적 고향 명이 밤나무골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나무골이라고 불렀지만 유독 밤나무가 많은 것을 아는 사람들은 밤나무골이라고 부르곤 했다. 모내기 철에 덤불마다 흐드러지게 피던 찔레꽃이 지고,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면서 마을을 둘러싼 산과 들에 온통 하얗게 피어난 밤꽃의 향기가 온 마을에 진동하곤 했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 친구들과 밤을 주우러 다니기도 하고, 아버지를 따라 장대 메고 뒷동산으로 밤을 따러 가곤 했다.
이제 한낮의 태양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길고 무더운 여름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도 꽃들은 때를 잊지 않고 피어나 맑은 향기를 흩어놓으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이른 아침 산책을 나서면 새로 피어난 꽃들이 나를 반긴다. 꽃보다 향기로 말을 거는 밤꽃과 달리 요즘 내 눈길을 끄는 꽃은 골목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능소화다.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요염한 자태로 골목을 지키고 피어 있는 능소화는 여름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송나라 문인 왕안석은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 했다. 뜻을 풀이하자면 ‘우거진 나무 그늘과 싱그러운 풀이 꽃보다 나은 때’라는 말이다. 하지만 자연은 시절 따라 모습을 바꿀 뿐 우열을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그보다 꽃처럼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향기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일이다.
이미지 확대보기백승훈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