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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의 미술 에세이 ⑨ 아시아 미술의 도약, 서양의 매트릭스를 부수고 피어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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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속에 남겨둔 탈리스만. 한명호. 2026

서문: 숫자 '1'의 트라우마, 그리고 소우주(Microcosm)의 붕괴


나에게는 숫자 '1'에 대한 지독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독일에서 11월 11일 11시는 사순절의 금욕 기간을 앞두고 미리 잔뜩 먹고 즐기는 사육제가 시작되는 시간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빼빼로데이로 불리는 가벼운 축제의 날입니다. 그러나 내 영혼에 가장 깊은 충격을 남긴 날짜는 2011년 1월 11일이었습니다.

그날 오전, 내게 날아온 문자 한 통은 이원일 큐레이터의 부고였습니다. 십여 년의 혹독한 방랑 생활로 등의 근육이 옆으로 활처럼 휘어버린 사내. 경찰의 아들이지만 팔뚝에 담배빵까지 남기고 있던 그깡으로도 한번 시작되면 육신이라는 하드웨어가 감당하지 못해 며칠 밤낮을 자지도, 눕지도, 앉지도 못하게 만들던 그 사나운 두통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나는 너무도 잘 압니다. 나 역시 같은 통증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두통이 가라앉도록 밤새 길거리를 걸어 다녀 보았기에, 아무도 없는 타향에서 그가 홀로 앓아냈을 그 맹렬한 고독과 고통을 알고 있었습니다.

죽기 전날 저녁에도 내 걱정을 먼저 해주던 다정한 친구는,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 매트릭스를 홀로 걷던 아시아의 전령

그의 삶은 처절한 구도의 길이었습니다. 무거운 카메라를 옆구리에 끼고 숨 가쁘게 히말라야를 오르내렸고, 좁은 차 안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하는 고단함 속에서도 모든 경비를 아껴 미술 서적을 사 모았습니다. 그렇게 몸을 갈아 넣어 유럽의 주요 미술관장들과 교류했고, 난징 비엔날레와 폴란드 비엔날레의 커미셔너로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묵묵히 짊어졌습니다. 마침내 그가 마지막에 쥐고 온 전리품은, 유럽 최고의 미술 잡지인 '아트프레쉬'의 아시아 편집권이었습니다.

그가 현대미술사 속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임종이 다가온 화려한 서양 미술, 미국 미술이 아니라 일본과 한국을 넘어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을 아우르는 '아시아 미술'이었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거장이 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을 비롯해 아시아 각국의 흙먼지 묻은 작가들에게 그는 각별한 애정을 쏟았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큐레이터들이 이해관계와 자본의 논리 속에 정신 못차리고 있을 때 진심으로 아시아의 작가들과 영혼과 공명(Spirit Resonance)해 준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원일이었습니다.

그의 부고를 받고 달려간 장례식장의 풍경은 서글펐습니다. 한국 작가들보다 먼 길을 날아온 외국 작가들이 더 눈에 띄었고, 생전 그에게 한국 미술의 세계 진출을 기대하며 수많은 짐을 지웠던 작가들은 화랑들이 보내온 화분 숫자만큼도 안 되어 민망할 지경이었지요. 어떤 경조사에도 참석하지 않는 나였지만, 그 날만큼은 텅 빈 빈소에 오래도록 머물며 그의 상처 입은 소우주를 애도하고 또 한번 미술계와의 이별을 다짐했습니다.

2. 서양 미술의 허상: 이데올로기의 거수기가 된 GPU 시대


언젠가 원일은 내게 말했습니다. 나처럼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표현을 무방비하게 쏟아내는 화가가 지금 당장 설 자리가 없다는 현실에는 동의하지만, 언젠가 아시아 미술의 시대가 도래할 때 형의 그림이 맨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그의 격려를 곱씹으며, 나는 작금의 현대 미술을 지배해 온 서양 미술사의 허상을 꿰뚫어 봅니다. 유럽과 미국의 현대 미술은 순수한 창조적 열망이라기보다, 거대한 산업과 경제의 균형 속에서 생겨난 정치적 '위악(僞惡)'이었습니다.

그리스 시대 이후 오랜 기간 대상을 똑같이 베껴내는 데 집착했던 유럽의 카톨릭적 '사실화'가 차갑고 교조적인 CPU(중앙처리장치)의 논리였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폭발한 '추상표현주의'는 무의식과 자동기술법에 기댄 화려한 GPU(그래픽처리장치)의 논리였습니다 GPU라는 것의 올바른 설명은 기능의 왜곡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능의 선택이라는것입니다. 미술로 말하자면 모든 미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미국이 제시한 미술이 정답이라는 논리인 것이지요.

미국은 전쟁의 상처와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환멸,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체계의 무거움을 던져 버리고자 하는 작가들에게 방탕함과 자유로움이야말로 궁극의 예술이고 미국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 속에서. 예술가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고 유혹을 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 미국의 산업자본과 결탁한 미술은, 추상표현주의 미술이라는 양식으로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본주의 매트릭스의 선전 도구이자 이데올로기의 거수기로 그 역할을 시작한 겁니다.

한명호. 인물. 2026이미지 확대보기
한명호. 인물. 2026
정정수작. 벽초지 전경이미지 확대보기
정정수작. 벽초지 전경
표현그룹 멤버 윤효준이미지 확대보기
표현그룹 멤버 윤효준

3. 오랜 묵언의 수련, 그리고 아시아 미술의 양자 도약(Quantum Leap)


유럽이 오랫동안 교회와 귀족을 중심으로 사실적 모사에 중심을 두다가 산업혁명으로 겨우 잠깐의 여명기를 거치는 경험 후에 모든 것은 미국의 주도로 미술사를 써가는 동안 한국과 아시아 각국은 전통과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과 작가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미국 유학파와 현대미술 사대주의자들이 미술 권력을 휘두르는데 반발하여 민중미술 등의 장르가 태어나기도 하고 순간마다 각 나라의 전통과 자부심은 더욱 강해졌다는 겁니다. 비록 메가 갤러리에 스카웃되어서 수백억 고가의 작품가를 휘날리는 챔피언은 없었다 해도 결코 많은 작가들이 무가치한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불교, 유교, 도교 문화와 아시아 각국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욕망의 시계추를 멈추는 비움의 철학(Kenosis), 캔버스 위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사회적 가면(Persona)을 벗어던지고 내면의 에너지를 응축해 내는 묵언의 조형적 수련들을 끝없이 이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오랜 정신적 수련이 때가 이른 시간 안에 서양의 얄팍한 상업주의를 밀어내고 세계 미술계의 중심에서 거대한 '양자 도약(Quantum Leap)'을 일으킬 것임을, 그리고 그 거룩한 굿판의 선두에 내 작품이 서게 될 것임을 함께 꿈꾸었습니다.

결론: 다시 1억 도의 붓을 쥐며, 태초의 캔버스로


그가 떠난 지 15년이 지난 엊그제, 나는 미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원일의 미망인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당시 그가 떠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젊은 미망인은 원일이 남긴 수천 개의 미술책들을 정리해줄 것을 부탁해왔지만 나는 서성록 평론가에게 전화 한 통 하는 것으로 가볍게 처리하고 서둘러 미술계를 떠났습니다. 나라가 없는데 무슨 독립운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지요. 이제 미술계로 돌아왔으니 원일의 흔적을 되돌아 봅니다.

원일아, 네가 그토록 갈망하던 아시아 미술, 한국 미술이 마침내 꽃피어날 때가 온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의 선두 주자들을 필두로 K팝과 문학,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이미 세계의 장벽을 부수고 나아가고 있구나.

물론 백남준 선생조차 동시대 유럽 작가들이 수백 억을 호가하는 시점에 '한국 작가'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가격을 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아직 우리 미술계는 메가 화랑들의 외면 속에 답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예전보다 훨씬 뛰어나고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네가 그토록 애써서 닦아 놓은 그 길 위로 이제 진짜 기회가 오기 시작한 거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붓을 든다.

기계적인 정교함에 길들여진 서양의 매트릭스를 단호히 거부하고, 내 몸 안의 숲이 부르는 소매틱 리듬(Somatic rhythm)을 따라 가장 뜨거운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붓질을 쏟아낼 것이다. 이 텅 빈 캔버스 앞에서 1억 도의 고독을 태워 창조해낸 나의 '핵융합'이, 언젠가 네가 꿈꾸었던 아시아 미술의 거대한 지평 위에 영원한 부적(Talisman)으로 빛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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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서양화가)

글쓴이/ 한명호(1957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및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박영덕화랑. 박여숙화랑. 현대아트갤러리. 갤러리Q, 부산화랑 등 다수), 단체전 및 국제전(화랑미술제-현대화랑, 북경아트페어-아트사이드갤러리 등), 최우수예술가상 미술부문 수상(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저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화가’ 등 다수


한명호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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