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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의 여유] 나를 비추는 거울, 라이벌의 흥망사 ‘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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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 한스미디어/ 신병주
고고학자들은 옛 도시 유적을 발굴할 때 성벽보다 먼저 묘지를 본다는 말이 있다. 외세에 맞서 도시 거주민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를 보여주는 성벽보다 공동체가 내부에서 어떻게 쇠퇴했는지를 드러내는 묘지를 먼저 살피면 도시의 역사를 더 빠르게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공동체가 외부의 침략보다 내부의 균열과 권력 충돌로 무너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은 인류가 남긴 수많은 유적 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가 주목한 우리 역사도 그렇다. 조직이 무너질 때 우리는 대개 외부의 위협을 먼저 떠올리지만 실제 역사를 돌이켜 보면 결정적 균열은 내부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 ‘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는 그 균열의 시원(始原)을 찾아 조선 후기부터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라이벌로 묶일 수 있는 역사 인물들의 관계는 실로 다양하다. 국가의 존망을 놓고 상반된 지략을 펼친 왕과 신하, 개혁의 방향과 속도를 놓고 첨예하게 맞선 개혁가와 보수파,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후계자들 같은 정치적 라이벌뿐 아니라 원효와 의상, 성삼문과 신숙주처럼 종교나 학문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간 대가들의 경쟁도 있었다.

책의 제목은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게 읽히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일차원적인 갈등처럼 보였던 대립이 실은 한 시대의 패러다임 전환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이었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위인전과 미디어를 통해 익숙하게 소비해온 라이벌 구도 이면에 당대 권력의 작동 방식과 시대 교체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데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단순한 부자(父子) 갈등이 아니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질로 끌려간 뒤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는 동북아 국제 레이짐(regime)의 전환을 포착해 실용 외교를 주창했지만, 인조는 금과옥조처럼 받들어온 사대교린 전통을 지키려고 했다. 저자는 이 갈등을, 변화하는 시대를 읽는 속도와 권력자의 인식이 어긋날 때 충돌이 불가피해진 사례로 해석한다.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대립도 마찬가지. 흔히 광해군은 실리 외교를 펼친 개혁 군주로, 인목대비는 정치적 희생자로 단순하게 묘사된다. 책은 라이벌 구도 이면 너머를 들여다본다. 왕권 강화를 시도한 광해군과, 인목대비를 중심으로 결집한 서인 세력 간 긴장은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 어떤 정치적 파장이 발생하는지 드러낸다. 권력의 정통성은 혈통이 아니라 동의의 축적에서 나온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이 책이 숱한 라이벌사를 관통해 보여주려는 핵심은, 라이벌이 단순한 제거 대상이 아니라 마치 거울처럼 자신이 가진 권력을 비춰보고 정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경쟁이 존재할 때 정책은 정교해지고 권력은 스스로를 검증하게 되지만, 견제 없는 권력은 결국 방향감각을 잃는다. 내부의 비판 세력을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시스템은 제 기능을 잃고 만다.

이 책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누가 이겼는지를 묻기보다 왜 갈등이 조정되지 못했는지, 왜 타협 대신 파국으로 향했는지, 그 구조적 한계를 탐색한다. 책을 덮고 나면 인물 개개인에 대한 평가보다 그들이 역사적 결단의 순간에 내린 결정과 선택의 무게가 더 오래 남는다. 그래서 이 책은 과거를 반추하는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나, 우리 조직, 우리나라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양준영 교보문고 eBook사업팀 과장



조용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yccho@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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