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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느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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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백승훈 시인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북한산 둘레길은 기존의 샛길을 연결하고 다듬어서 북한산 자락을 완만하게 걸을 수 있는 저지대 수평 산책로다. 북한산 자락을 따라 한 바퀴 돌 수 있는 둘레길은 전체 길이가 71.5㎞에 이르지만 21개의 다양한 코스가 있어 누구나 쉽게 자연과 벗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숲 모임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여서 송년 모임을 겸하다 보니 걷기에도 편하고 시간도 여유로운 둘레길을 택한 것이었다. 코스도 길지 않고 걷는 길도 편안하여 여느 때와 달리 시간도, 마음도 여유로웠다. 12월의 싸늘한 냉기는 걸음을 재촉하기에 좋은 조건이었지만 우리는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사부작사부작 걸었다.
도봉산역 앞에서 만나 도봉옛길에서 출발해 왕실묘역길 구간까지 걸었다. 도봉산에 올라 해맞이를 하며 새해를 맞이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끝자락이라니. 새삼 세월의 빠른 속도에 놀라기도 하며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함께했던 추억담을 나누었다. 도봉옛길 일부 구간은 공사 중이라서 우회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여느 때 같으면 길을 돌아가게 만든 공사를 탓했을 테지만 시간이 넉넉하고 마음도 여유로우니 누구 하나 돌아가는 먼 길을 탓하지 않았다. 갈 길이 멀면 몸도 마음도 바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늑장을 피워도 세 시간이면 너끈히 걸을 수 있다 보니 오히려 거리가 늘어나는 게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황지우 시인은 “삶이란 얼마간의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걸었던 북한산 둘레길은 마치 반추위를 지닌 순한 초식동물처럼 천천히 추억을 되새기며 걷기에 안성맞춤인 좋은 길이었다. 숲길을 걷는 즐거움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가속 페달을 밟아 대던 일상에서 벗어나 세상의 속도에 눈감고 서두르는 법 없이 자신만의 속도를 지키면서도 모든 것을 완성하는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숲길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인적이 드문 겨울 산길을 천천히 걸으며 찬찬히 관찰한 자연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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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구간이 끝나고 쌍둥이 전망대까지는 오르막 구간이다. 군데군데 나무 계단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능선을 타고 걷는 길이라 굽이를 돌 때마다 도봉의 바위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냉기를 품은 북풍이 낙엽의 향기마저 날려버린 듯 가랑잎은 바싹 마른 채 숲을 덮고 있을 뿐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는다. 숲의 고요를 흔드는 것은 우리들의 발소리와 청딱따구리의 죽은 나무를 쪼는 소리, 가랑잎 위를 뛰어 나무 위로 달아나는 청솔모 정도다. 둘레길에 세워진 쌍둥이 전망대는 도시를 둘러싼 주변의 산들과 도시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도봉산과 북한산, 수락산과 불암산, 멀리 롯데타워까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간간이 소나무도 보이기는 하지만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 대부분은 참나무다. 따라서 숲을 덮고 있는 낙엽들도 거의 참나무 가랑잎이지만 참나무 중에도 신갈나무만은 마른 잎을 단 채 겨울을 견딘다. 저마다 삶의 방식이 다른 것처럼 활엽수라 해서 모두 잎을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느린 것은 뒤처지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빠르면 빠른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에 정비례한다”고 했다.

모든 순간을 느리게 살 수는 없지만 가끔은 세상의 속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속도로 숨을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속도에만 집착하다 보면 자칫 방향을 잃을 수도 있다. 멈춰 서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이 있듯이 천천히 걷다 보면 삶이 그저 흘러가는 게 아니라 깊어지는 것이 된다. 그 느림의 시간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견디는 힘이 된다. 느림은 삶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스스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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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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