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일본은 역사적으로 빚이 적은 국가였다. 제국주의 일본 시대는 물론 2차 대전 이후 수십년동안 빚이 거의 없는 아주 알찬 재정을 꾸려왔다. 빚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1995년부터 이다. 버블 붕괴로 디플레가 엄습하자 그 위기를 돌파하겠다며 정부가 대대적으로 재정을 풀어제낀 것이 국가부채 폭발의 시작이었다. 특히 1998년 집권한 자민당 소속의 오부치 게이조(おぶち けいぞう) 총리는 스스로를 "부채왕(借金王)"으로 칭하면서 재정 지출을 엄청나게 늘렸다. 3개의 화살로 유명한 아베 총리 이전까지 일본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돈을 푼 총리가 바로 오부치이다. 오부치의 재정 퍼붓기가 경기부양 효과를 조금씩 내던 2008년 이번에는 미국에서 서브 프라임 사태가 터졌다. 미국과 연결고리가 유난히 많았던 일본 기업들이 글로벌 금융위기에 연쇄도산 위기에 처했다. 당황한 일본 정부는 재정을 더 퍼부었다. 2011년에는 역사상 최악이라는 동일본 대지진(2011년) 까지 터졌다. 그 재난을 수습하느라 돈을 퍼부을 수 밖에 없었다. 2013년부터 아베노믹스가 시작됐다. 일본은행의 기준금리와 국채수익률을 마이너스로 끌어내린 상태에서 통화량을 무한정 늘렸다. 국가부채가 1000조엔을 돌파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다. 그래도 일본의 디플레는 수습되지 않았다. 2019년에는 코로나19가 엄습했다. 펜데믹 대응을 한다고 또 엄청난 규모의 추경을 쏟아냈다. 일본은행이 돈을 찍어 재무성의 국채를 마구 사들이는 이른바 양적완화(QE)라는 칼도 빼들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의 국가부채 비율은 아프리카 후진국을 빼고는 세계 최고인 250%까지 치솟은 것이다.
그동안 워낙 많은 돈을 푼 탓에 최근들어 일본의 물가는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소비자물가즉 CPI 상승률이 한국보다 더 높은 3% 선까지 올라와 있다. 문제는 경기 부진이다. 경제학의 필립스 곡선 이론에 따르면 돈을 풀면 물가와 경기가 함께 오르게 된다. 지금 일본 경제에서는 이 필립스 곡선의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하지 않고 있다. 물가는 오르는데 경기는 여전히 시큰둥하다. 치솟는 물가 때문에 더 이상 금리인하와 양적완화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물가 문제가 놓고 보면 오히려 금리인상과 양적축소가 필요한 시점이다. 실제로 일본은행은 기준금리를 35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렸다.
이 어수선한 상황에 일본의 리더십이 교체됐다. 물가폭등으로 인기가 급락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가 전격 사임하면서 그 후임으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가 새 총리(제104대)로 왔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이다. 다카이치는 총리 취임 후 얼마되지 않아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다시 치렀다. 이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은 3분의 2를 넘어서는 압도적 다수를 확보했다. 다카이치와 집권 자민당이 유권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받아낸 가장 큰 원동력은 물가폭등으로 신음하고 있는 일본 경제를 반드시 살려 내겠다는 이른바 사나에노믹스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다.
사나에노믹스란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이름에 이코노믹스를 덧붙인 일본어와 영어 합성어이다. 한마디로 다카이치의 경제인 셈이다. 사나에노믹스는 10여년이상 일본을 풍미해온 아베노믹스와는 전혀 다른 일본을 살리는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담고 있다. 아베노믹스가 역점을 두어왔던 금리인하와 양적완화와 같은 금융완화 정책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뛰는 물가를 잡기 위해서는 그 반대로 금융긴축을 할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사나에노믹스의 핵심은 재정이다. 일본어로 責任ある財政 즉 세키닌 아루 자이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책임’이다. 재정 정책으로 일본 경제를 책임지고 살려내겠다는 뜻이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재정을 통한 자금의 살포이다. 반도체 AI 양자컴 등 국가 전략 산업으로 지정한 17개 분야를 집중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식품소비세와 유류세를 감축 또는 폐지함으로써 서민들의 물가 고통을 덜어주겠다고 하는 것도 다카이치가 말하는 책임있는 재정의 한 축이다.
정부가 이런 식으로 세출을 늘리면서 세금 수입은 오히려 줄이면 재정적자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재정적자 확대는 국가 부채의 증가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일본은 그러지 않아도 국가부채가 많은 나라이다. GDP 대비 국가 부채의 비율이 무려 260%에 달한다. 국가부채가 너무 많아 이미 빨간 불이 들어온 상태이다. 다카이치가 정통파 경제학의 이같은 경고를 모를 리가 없다. 다카이치는 고베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경제학을 접한 광의의 경제학도로 볼 수 있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경제 산업성과 경제 안보성 대신(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다가이치가 부작용을 잘 알면서도 재정 퍼주기를 밀어 부치는 데에는 나름 논리적 근거가 있다. 그 근가가 바로 도마(Domar)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도마의 조건이란 에그세스 도마라는 경제학자가 만든 성장 모델 이론이다. 재정을 풀어 성장률을 높이고 그 명목 성장률이 명목 국채이자율 보다 높을 수만 있다면 재정적자 상태에서도 재정 지출을 더 늘리는 게 유리할 수 있다는 가설이다. 국채이자보 더 높은 고도 성장으로 기업의 이익이 크게 늘어나면 거기서 나오는 법인세 수입으로 부채 이자를 감당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언론들이 사나에노믹스를 도마의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카이치는 특히 17대 전략산업의 육성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도마의 조건은 경제학의 세계에서 공인된 이론은 아니다. 그저 하나의 주장일 뿐 이다. 통상적으로 명목 성장률이 올라가면 명목이자률도 덩달아 올라간다. 이자율이 더 빨리 오르면 도마의 조건은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다카이치가 여기에 목을 매는 것은 다른 대안이 없다는 현실적 한계때문이다, 30년 이상 이어져온 일침체의 늪이 너무 깊어 전통적인 정책으로는 불황 탈출이 어렵다는 점이다. 어차피 안되는 상황에서 쇼크 요법이라도 써보자는 심정으로 부작용을 알면서도 충격 요법인 재정퍼주기 카드를 뽑아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카이치의 실험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일본의 병은 더 깊어질 것이다. 잃어버린 30년을 넘어 잃어버린 50년 아니 잃어버린 100년의 트랩에 빠져들 수도 있다. 다가이치의 운명은 도마의 조건에 달려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