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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詩가 있는 송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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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송년회, 백승훈 시인
마침내 12월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야말로 ‘마침내’란 부사가 가장 잘 어울리는 달이다. ‘마침내’란 말 속엔 지난 열한 달의 시간을 잘 견디고 통과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12월 달력 한 장의 무게가 지난 열한 달의 무게와 맞먹는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새해를 맞이한 게 엊그제 같은데 속절없이 또 한 해가 덧없이 지나간다는 생각에 공연히 안절부절못하고 허투루 살아온 지난 삶을 반성하기도 하고, 때늦은 후회를 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이벤트가 송년회다. 직장을 비롯해 동창이나 친구 모임, 각종 동호회까지 송년회 모임도 다양하고 모임마다 송년회의 풍경도 제각각이고 천차만별이다.
지난 주말, 고향에서 나의 모교 동문회 송년 행사가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지도 어느덧 반백 년이 가까운 터라 선뜻 참석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시 낭송을 해달라는 주최 측의 부탁에 마다할 수가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동창들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흥 돋우는 초청 가수 공연도 보고 노래자랑이나 하는 대개의 송년 모임과 달리 시화전도 하고 시 낭송도 하는 특별한 송년회를 하려 한다는 기획 취지에 덜컥 승낙하고 말았다. 솜씨 없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시화를 만들어 표구도 하고 무대에서 낭송할 시로 ‘울컥하다’를 골라 부지런히 외운 덕분에 무사히 낭송을 마쳤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그녀가 산다// 경기도 포천시 동교동 255-2번지/ 정든 집 비워 두고/전입신고도 없이/ 몸부터 먼저 가 누운 샘물노인요양원// 얘야, 밥 먹어야지. 밥 먹고 가!// 짧은 면회 마치고/ 요양원 입구 길모퉁이 카페/ 앵두나무 우물가에 돌아 나올 때/ 등 뒤로 들려오던 어머니 음성/ 차는 돌부리에 채어 덜컥하고/ 나는 노모의 목소리에 걸려 울컥하고.” – 나의 졸시 ‘울컥하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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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는 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요양원에 계실 때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썼던 시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나의 어머니도 치매로 점점 기억이 흐려져 가면서도 자식의 끼니 걱정만은 늘 입에 달고 사셨다.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를 내려오며 나는 나이 서른아홉에 미국 순회 시 낭송 여행 중에 뉴욕의 호텔에서 과음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 시인 딜런 토머스(1914~1953)를 떠올리며 잠시 울컥하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겨우 어머니의 말씀만 생각하며 시를 끄적였는데 그는 죽음 앞에 너무 신사적인 아버지에게 간청하듯 이렇게 외친다. "그냥 순순히 작별 인사 하지 마세요/ 늙은이도 하루가 끝날 때 뜨겁게 몸부림치고 소리쳐야 합니다/ 빛의 소멸에 대항해 분노, 분노하세요"라고.

인용한 시는 딜런 토머스의 대표작인 ‘그냥 순순히 작별 인사 하지 마세요(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의 일부다. 웨일스 지방의 영어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머스는 어려서 천식을 앓았고 글을 배우기 전부터 아버지가 읽어주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들으며 자랐다. 학교를 싫어했던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지방 신문 기자를 하다 그만두고 시를 쓰며 평생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았다. 가수 밥 딜런은 자신이 숭배하는 딜런 토머스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성까지 고쳤다고 한다. 이 시를 나의 자작시와 함께 낭송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고, 죽기 전까진 절대 안 죽는다는 말처럼 송년회 모임이 잦은 12월이라고 해서 지레 포기하고 순순히 세상과 작별하지는 마시라 권하고 싶다. 마지막 순간까지 빛의 소멸에 대해 맞서며 생명의 존귀함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12월이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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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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