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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美 제재로 막히자 코인 결제 허용…외환통제도 완화

테더·비트코인으로 무역대금 결제…미신고 수출대금 134조원 넘어
미국과 이란이 전쟁 종식과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에 합의했다고 밝힌 뒤인 지난 6월 15일(현지시각) 이란 수도 테헤란 거리에서 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미국과 이란이 전쟁 종식과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에 합의했다고 밝힌 뒤인 지난 6월 15일(현지시각) 이란 수도 테헤란 거리에서 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사진=로이터

미국의 해상 봉쇄와 제재 강화로 국제 금융망 접근이 더욱 어려워진 이란이 암호화폐를 활용해 무역과 자금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수해온 외환 통제를 사실상 완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출기업들이 테더와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로 해외 거래대금을 결제하거나 수출대금을 국내로 들여오는 것을 중앙은행이 묵인하고 있으며, 수출로 번 외화를 공식 외환시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수입에 사용하는 것도 허용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란 기업과 정권 관계자, 전문가들을 인용해 이란 중앙은행이 최근 수개월간 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기업들에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해외 자금을 국내로 들여오도록 사실상 장려하고 있다고 9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이란은 오랫동안 국제 금융시스템에서 차단된 상태에서 외화 공급을 통제하기 위해 수입·수출업체에 엄격한 규제를 적용해왔다.

그러나 이런 규제로 기업들이 국내외에 신고하지 않은 자금을 쌓아놓으면서 그 규모가 이란 사법당국 추산 1000억달러(약 134조4100억원)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 테더·비트코인 무역결제 사실상 용인


정책 변화의 핵심은 암호화폐다.

FT에 따르면 이란 기업들은 현지 암호화폐 거래소를 통해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 테더를 비롯해 비트코인을 국경 간 거래 결제에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한 이란 기업인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지난 2월 전쟁을 시작한 이후 이런 규제 완화가 광범위해졌다며 수출대금을 암호화폐로 받는 방식이 이제 사실상 정착됐다고 밝혔다.

중앙은행은 자금이 어떤 방식으로 이전됐는지를 예전처럼 엄격하게 따지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기업들은 정부가 정한 공식 환율을 사용하는 대신 대규모 민간 외환시장에서 외화를 환전할 수도 있다. 수출로 벌어들인 자금을 공식 외환시스템에 넘기지 않고 곧바로 원자재나 필요한 상품을 수입하는 데 사용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란은 이미 수년 동안 미국 제재를 피하기 위해 암호화폐를 포함한 대체 금융망을 구축해왔다. 그러나 전쟁과 미국의 항구 봉쇄가 장기화하면서 국경 간 거래를 유지할 대체 수단을 찾는 일이 더욱 절박해졌다고 FT는 전했다.
블록체인 데이터업체 TRM랩스에 따르면 2025년 이란을 통해 이동한 암호화폐 규모는 약 100억달러(약 13조4410억원)에 달했다.

◇ 100조원 넘는 수출대금 해외에 묶여


이란이 외환 규제를 풀게 된 데는 기존 제도의 부작용도 영향을 미쳤다.

전쟁 이전 이란의 석유와 기타 상품 수출업체들은 해외에서 번 돈의 상당 부분을 외화로 국내에 들여와 정부가 운영하는 지정 플랫폼에서 공식 환율로 매각해야 했다.

공식 환율은 시장가격보다 크게 낮은 경우가 많아 수출업체들의 불만이 컸다. 상당수 기업은 수출대금을 해외에 그대로 보관하거나 신고하지 않고 국내로 반입했다.

자비홀라 호다이안 이란 국가감사기구 대표는 “지난달 개인과 기업 2만곳 이상이 총 940억유로(약 146조7124억원)에 달하는 외화를 국내로 되돌려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이란국영석유정제유통회사, 이란국영가스회사, 이란해양석유회사 등 국영 석유·가스 기업들도 포함됐다.

이란 기업들이 해외 자금을 되가져오는 주요 통로는 여전히 인접국의 환전업체들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은 최근 규제를 완화해 기업들이 암호화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최소한 일부 외화 환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선택지를 넓힌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테더는 미국 달러와 가치가 연동돼 가격 변동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점에서 국경 간 거래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이 미국의 제재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테더는 지난 4월 미국 당국이 이란 중앙은행과 연계됐다고 파악한 지갑에 있던 3억4400만달러(약 4624억원) 규모의 테더를 동결했다.

미 재무부도 디지털 자산을 통해 이란과 거래하는 개인이나 기업을 제재할 수 있다며 이란 정권이 제재 회피 수단으로 암호화폐를 갈수록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 규제 풀면서 미신고 자금 단속 병행


이란 당국은 한편으로 암호화폐와 외환 규제를 완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해외에 수출대금을 계속 쌓아놓는 기업에 대한 단속은 강화하고 있다.

호다이안 대표는 235억유로(약 36조6781억원)의 미환류 자금과 관련해 개인과 기업 219곳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란 사법부 대변인은 8일 석유 거래업자와 관련된 22명을 체포했으며 19명에 대해서는 체포영장이 발부됐다고 밝혔다.

이란은 싼 국내 에너지를 활용한 비트코인 채굴로도 암호화폐를 확보해왔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엘립틱은 전 세계 비트코인 채굴의 약 4.5%가 이란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를 통해 이란이 무역금지 조치를 우회하고 수입대금을 지급하는 데 사용할 암호자산을 확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알리레자 보조르그메흐리 이란디지털전환협회 관계자는 중앙은행이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한 감독을 느슨하게 하고 규정을 예전처럼 엄격하게 집행하지 않고 있다고 인정했다.

다만 암호화폐 거래량이 늘고 있다고 해도 이란 경제가 필요로 하는 막대한 외화를 충당하기에는 규모가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란 정치경제학자 사이드 라일라즈는 “미국이 이란에 남은 국제 금융통로까지 차단하려 할수록 암호화폐의 중요성이 더 커질 것”이라며 “경제가 지하화될수록 암호화폐를 사용할 필요성도 커진다”고 말했다.

미국의 제재와 해상 봉쇄가 강화되면서 이란이 수십년간 유지해온 외환통제 원칙까지 완화하는 가운데 암호화폐가 단순한 투자자산을 넘어 국제 금융망에서 고립된 이란의 대체 무역결제 수단으로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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