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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네덜란드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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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박사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전 고려대 교수
1959년의 일이다. 네덜란드 북부 흐로닝언(Groningen) 지하에서 유럽 최대 규모의 천연가스전이 발견됐다. 전후 복구와 산업화로 에너지를 갈망한 서유럽 한복판에 거대한 자원 보고가 열린 셈이었다. 1960년대부터 국고로 천문학적인 가스 수출 대금이 유입되자 경상수지는 사상 최대 흑자를 기록했고 정부 재정은 풍족해졌으며 복지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팽창했다. 당대 관료와 언론은 이를 ‘네덜란드의 기적’이라 칭송했다.
화려한 잔치는 10여 년 만에 파국으로 변했다. 가스 수출 대금의 대규모 유입은 외환시장에서 길더(Guilder)화의 급격한 실질 환율 절상을 불렀고, 이는 기계, 조선, 섬유, 정밀화학 등 전통 공산품 제조업의 가격 경쟁력을 단숨에 파괴했다. 수출길이 막히고 저가 수입품이 내수를 잠식했다. 가스 부문의 수익성이 치솟자 인재와 자본이 썰물처럼 쏠렸고, 비(非)에너지 제조업의 임금과 지대가 폭등해 채산성을 잃은 공장들은 연쇄 휴·폐업에 돌입했다.

1970년대 후반 글로벌 경기 둔화와 에너지 가격 급락이 겹치자 붕괴된 제조업 기반, 청년 실업 급등, 만성 재정 적자의 민낯이 드러났다. 1977년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 구조적 자멸을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라 명명했다. 자원의 발견이라는 축복이 국가 산업 생태계를 마비시킨 전형적인 ‘풍요의 역설’이었다.

반세기 전 네덜란드의 비극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정밀하게 재현되고 있다. 자원 빈국 한국은 반세기 동안 피땀 어린 노력으로 디지털 문명의 핵심 자산인 ‘반도체’라는 독보적 실리콘 유전을 일구었다. 데이터센터와 고대역폭 메모리(HBM) 수요 폭증에 힘입어 반도체 산업은 다시금 슈퍼 사이클의 정점에 섰다. 월간 수출액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코스피 시가총액은 반도체 대장주가 견인한다.
그러나 화려한 장막 뒤 거시경제의 실상은 전혀 다른다. 반도체 단 하나의 기둥을 제외하면 철강은 공급 과잉, 석유화학은 구조조정, 이차전지는 전기차 캐즘(Chasm)의 수렁에 갇혔다. 중소 부품 협력사의 가동률은 급락했고, 자영업 폐업과 청년 체감 실업률은 치솟고 있다. 거시 지표의 눈부신 성장과 체감 민생의 혹한기라는 극단적 단절은, 한국 경제가 단일 초격차 산업의 통계적 착시에 취해 전체 산업 기반의 붕괴를 보지 못하는 ‘한국형 네덜란드 병’의 중증 단계에 진입했음을 뜻한다.

한국 경제의 착시는 수치로 명확히 드러난다. 국가 총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은 통상 20%를 상회하며 호황기에는 25%에 육박한다. 상장사 전체 영업이익의 30~50%를 단 두 개 반도체 기업이 담당하는 기형적 단극화는 OECD 국가 중 유례가 없다. 가장 치명적인 부작용은 ‘정책적 방심(Policy Complacency)’이다. 반도체가 가려주는 무역 흑자와 성장률 수치 뒤에서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연금·교육 개혁, 규제 철폐 등 생존 과제들이 후순위로 밀려났다. 세수가 늘자 재정 건전성에 대한 안이한 낙관론 속에 단기 선심성 지출이 팽창했다. 가스전 수익에 취해 복지 장부를 채우던 과거 네덜란드 관료들의 행태와 판박이다. 반도체를 제거하는 순간 한국의 실질 성장 잠재력은 이미 구조적 침체에 들어서 있었다. 진통제로 다발성 장기부전을 마취시키고 있는 셈이다.

네덜란드 병의 본질인 ‘자원 이동 효과’와 ‘지출 효과’는 한국에서 더욱 파괴적으로 작동한다. 고급 인재의 쏠림과 기초 공학 붕괴: 최상위 이공계 인재는 반도체 계약학과나 의대로만 집중된다. 기계, 금속재료, 화학, 토목, 시스템 등 기초 공학과는 정원 미달과 연구실 폐쇄 위기에 놓였다. 기술 패러다임 전환을 버텨낼 기초 체력이 고갈되는 중이다. 정부 재정과 금융권 여신이 반도체 클러스터와 밸류체인으로 빨려 들어가며 소프트웨어, 로봇, 바이오, 친환경 기술 등 차세대 유망 스타트업 생태계는 유동성 가뭄을 겪고 있다. 첨단 반도체 팹의 막대한 전력·용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전력망과 발전 설비 계획이 수도권 남부로 집중되며, 지방의 산업 유치 기회 박탈과 수도권 일극 체제를 가속하고 있다.

네덜란드 병의 도화선은 원자재 가격의 급락이었다. 한국 반도체 수출의 핵인 DRAM과 NAND 플래시는 본질적으로 극심한 ‘경기 순환형(Cyclical) 원자재’다. 글로벌 빅테크의 서버 투자 주기와 수급에 따라 고정거래가격이 요동치며, 호황기 영업이익률 50%를 찍다가도 다운사이클에서는 수조 원대 적자로 추락한다. 단일 품목의 가격 등락에 환율, 세수, 국가 신용등급까지 출렁이는 선진국은 없다. AI 인프라의 수익성(ROI) 검증이 본격화되어 투자가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순간, 감당하기 힘든 재고와 공급 과잉의 청구서가 날아올 수 있다. 지정학 리스크는 위험을 배가한다. 미·중 기술 패권 전쟁 속에서 미국은 대중 규제와 투자 압박을 가하고, 최대 시장인 중국은 국가 보조금을 쏟아부어 반도체 자립을 벼르고 있다. 반도체에 모든 명운을 건 한국 경제는 열강의 외교적 통상 압박에 국가 전체가 흔들리는 가장 손쉬운 볼모가 되었다.
네덜란드와 같은 북해 유전을 두고도 정반대의 길을 걸어 성공한 모범 사례가 있다. 바로 노르웨이다. 1969년 에코피스크 유전 개발 당시 노르웨이는 석유 수익을 일반 재정에 편입하지 않고 ‘정부연금펀드(GPFG)’를 통해 해외 주식·채권·부동산으로 전액 분산 투자했다. 이 같은 외화 격리 메커니즘을 통해 국내 통화 가치의 급등을 막아 조선, 해양 엔지니어링, 수산업 등 비석유 제조업의 경쟁력을 보존했다. 나아가 유가 급락기에는 해외 자산의 배당 수익으로 거시경제를 방어하고, 펀드 수익을 첨단 R&D와 교육 인프라에 재투자해 ‘자원 고갈 이후에도 지속 가능한 지식 기반 경제’를 구축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과실을 포퓰리즘 예산으로 낭비해서는 안 된다. 초과 법인세수를 흥청망청 쓰다가는 그야말로 네덜란드의 꼴이 날 수 있다. 서둘러 다각화된 산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해야 한다. 특정 산업이 흔들려도 국가가 버틸 수 있도록 AI 소프트웨어, 차세대 모빌리티·우주항공, 바이오, 로봇, 수소·에너지 등 5대 미래 전략 분야의 규제를 혁파하고 파격적인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반도체 내부에서도 메모리 쏠림을 벗어나 시스템 반도체, 팹리스, 디자인하우스, 첨단 패키징, 소부장 원천기술 생태계로 체질을 다변화해야 한다.

반도체는 무에서 유를 일구며 한국을 선진국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주역이다. 그러나 단일 엔진 하나에 국가의 모든 명운을 맡긴 비행체는 순항할 수 없다. 유일한 엔진마저 꺼지거나 사이클의 역풍을 맞닥뜨리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추락뿐이다. 흐로닝언의 천연가스가 준비되지 않은 네덜란드에 독배가 되었듯, 통계적 환각에 취해 구조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그 비극은 온전히 한국의 몫이 된다. 풍요의 저주는 가장 화려한 호황의 정점에서 시작된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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