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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경고 20년에도 유럽은 왜 준비 못했나

2003년 7만명 사망 뒤 대책 마련했지만 병원·학교·철도 또 마비
에어컨 논쟁 넘어 주거·도시·의료 인프라 적응 과제로 부상
지난 24일(현지시각) 폭염이 닥친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 고가철로 아래 임시 캠프에서 이주민들이 매트리스에 누워 쉬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지난 24일(현지시각) 폭염이 닥친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 고가철로 아래 임시 캠프에서 이주민들이 매트리스에 누워 쉬고 있다. 사진=로이터

유럽이 또다시 기록적인 폭염에 흔들리고 있다.

지난 2003년 폭염으로 약 7만명이 숨진 뒤 조기경보 체계와 폭염 대응 계획이 마련됐지만 병원과 학교, 철도, 주택 인프라는 더 강해진 더위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폭염이 더 잦고 강해지는 속도를 유럽의 적응 대책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8일(현지시각) 유럽이 수십 년간 기후 과학자들의 경고를 들어왔지만 여전히 폭염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 원인을 짚었다.

이번 폭염으로 프랑스는 역대 가장 더운 낮과 밤을 겪었고 영국과 스위스는 6월 기온 기록을 갈아치웠다.

◇ 2003년 참사 뒤에도 반복되는 취약성


가디언에 따르면 유럽의 폭염 대응은 지난 2003년 여름 참사를 계기로 본격화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는 극심한 더위로 약 7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노인, 여성, 혼자 사는 사람 등 취약계층 피해가 컸다. 낮에는 고온이 몸에 부담을 줬고 밤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회복할 시간이 없었다.

이후 각국 정부는 기온이 위험 수준에 오르면 조기경보를 발령하고 학교 폐쇄나 이동 제한, 병원 비응급 진료 조정 같은 대응책을 마련했다. 실제 이런 대책은 일정 부분 효과를 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03년과 같은 강도의 폭염이 오늘날 다시 닥칠 경우 예상 사망자가 75%가량 줄어들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문제는 폭염 자체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예외적 폭염이 이제는 반복되는 여름 위험이 됐고, 오늘의 극단적 더위가 미래에는 더 흔한 현상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가디언은 “과거의 예외가 오늘의 표준이 되고 오늘의 예외가 내일의 표준이 되는 흐름”이라고 진단했다.

◇ 병원·학교·철도까지 더위에 흔들려


이번 폭염은 유럽 사회 곳곳의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영국에서는 일부 병원이 극심한 더위로 비상 상황을 선언했다. 냉방 장비가 고장 나고, 핵심 IT 시스템이 멈추는 사례도 발생했다.

학교, 직장, 철도도 영향을 받았다. 일부 보육시설과 학교는 건물 내부 온도가 위험 수준까지 오를 수 있다며 조기 하원을 요청했다. 철도와 교통망은 폭염에 따른 설비 부담으로 차질을 빚었다. 산불도 곳곳에서 발생했다.

프랑스에서는 더위를 피하려다 익사한 사람이 55명을 넘었고 뜨거운 차량 안에서 어린이 4명이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원전도 냉각수 부족 문제로 일부 가동을 멈췄다. 강과 하천 수온이 높아지면 원전이 냉각수를 충분히 쓰기 어려워지고 이는 전력 공급 안정성에도 부담이 된다.

◇ 기후변화가 만든 ‘새 폭염’

유럽은 다른 대륙보다 빠르게 더워지고 있다. 북극권의 급격한 온난화와 지역적 기상 패턴이 맞물리면서 유럽의 기온 상승 속도는 세계 평균을 웃돈다.

국제 기후 연구단체 월드웨더어트리뷰션(WWA)은 이번 유럽 폭염이 “50년 전 같은 시기에는 사실상 발생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야간 고온은 2003년 당시보다 훨씬 더 가능성이 커졌고 낮 최고기온도 과거보다 발생 확률이 크게 높아졌다고 WWA는 지적했다.

야간 폭염은 건강에 특히 위험하다. 낮 동안 열을 받은 몸이 밤에 식지 못하면 심혈관계와 호흡기계 부담이 커지고 고령자와 만성질환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폭염 사망자가 공식 집계보다 뒤늦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최근 4년 동안 유럽에서 폭염으로 약 20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한다. 한스 클루게 WHO 유럽지역사무소장은 “폭염 사망의 상당수는 예방할 수 있었고 실제 피해는 사망자 통계보다 훨씬 넓게 나타난다”고 경고했다.

◇ 에어컨만으로는 해결 어려운 유럽의 고민


폭염이 심해지면서 유럽에서는 에어컨 논쟁도 커지고 있다. 미국처럼 대규모로 에어컨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전력망 부담과 도시 열섬 효과, 온실가스 배출 문제를 우려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WHO는 에어컨을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한 해결책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고온에 취약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보호 수단이라는 입장이다. 병원, 요양시설, 학교, 대중교통처럼 취약계층이 오래 머무는 공간에는 냉방 대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유럽의 어려움은 오래된 건물 구조와도 맞물려 있다. 상당수 주택은 추운 겨울을 버티는 데 맞춰 설계됐고 여름철 폭염을 식히는 데에는 취약하다는 지적이다. 프랑스에서는 전체 주택의 절반가량이 고온에 대한 보호 기능이 부족한 것으로 지적된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에어컨 설치만이 아니라 그늘 확대, 건물 차광, 환기 개선, 도시 녹지 확충, 단열 보강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열을 막고, 실내에 쌓인 열을 빼내고, 도시 전체의 온도를 낮추는 좀 더 구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 기억은 짧고 폭염은 강해진다


유럽 각국은 2003년 이후 폭염의 위험을 배웠지만 여름이 지나면 경각심이 빠르게 사라지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폭염은 홍수나 산불처럼 눈에 보이는 파괴를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조용하고 광범위하게 생명을 위협한다.

기후학자들은 유럽의 폭염이 더 이상 드문 재난이 아니라고 말한다. 탄소 배출이 계속되는 한 폭염은 더 길고, 더 뜨겁고, 더 자주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단기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결국 유럽의 과제는 폭염을 일시적 기상이변이 아니라 여름철 상시 위험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학교와 병원, 철도, 주택, 전력망을 더운 기후에 맞게 바꾸지 않으면 경고는 반복되고 피해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가디언은 “유럽이 과거의 비극에서 일부 교훈을 얻었지만 기후변화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폭염의 속도에는 아직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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