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노동자 42% 예상보다 조기 퇴직… 자산 착시 속 '비자발적 퇴장' 속출
저축률 14.4% 역대 최고치에도 시장 변동성에 퇴직연금 계좌 잔액은 감소
한국, 소득 단절·자산 묶임·연금 공백 '3중 단절'… 은퇴 설계 기준점 전면 수정을
저축률 14.4% 역대 최고치에도 시장 변동성에 퇴직연금 계좌 잔액은 감소
한국, 소득 단절·자산 묶임·연금 공백 '3중 단절'… 은퇴 설계 기준점 전면 수정을
이미지 확대보기은퇴 설계의 최대 리스크는 자산 수익률이 아니라 '예상보다 빨리 끝나는 노동'이다.
배런스(Barron's)는 지난 29일(현지시각) 미국 노동자의 상당수가 자발적 선택이 아닌 고용 불안과 건강 악화 탓에 계획보다 조기에 일터를 떠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자산 운용사 알리안츠 라이프(Allianz Life)가 발표한 최신 조사에 따르면 미국 은퇴자의 42%가 당초 예상보다 이른 시점에 퇴직했다. 반면 재정적 준비를 마치고 스스로 은퇴를 결정한 비중은 21%에 그쳤다. 조기 은퇴자의 2명 중 1명 이상이 아무런 준비 없이 일터에서 밀려난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른바 노후의 '백조의 덫(Wealth Illusion)'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백조의 덫이란 부동산 가격 상승이나 주식 평가이익으로 인해 겉보기에는 자산 규모가 충분해 보이지만, 실제 매달 쥘 수 있는 현금흐름이 부족하고 비자발적 퇴직 같은 외생 변수에 무방비로 노출된 취약한 재정 상태를 뜻한다.
알리안츠 라이프의 소비자 통찰 부문 부사장 켈리 라비네(Kelly LaVigne)는 조기 퇴직이 준비된 자산 계획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고 경고했다.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기간은 줄어드는 반면 자산이 필요한 은퇴 기간은 늘어나 저축 예치금에 가해지는 압박이 급격히 커지기 때문이다.
건강 악화와 고용 불안이 부른 타의적 퇴직의 실상
알리안츠 라이프의 세부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조기 은퇴를 촉발한 핵심 위험 요인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조기 은퇴자의 30%는 일터를 떠난 주된 이유로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를 꼽았다.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경영 악화로 일자리를 잃어 어쩔 수 없이 퇴직을 택한 비율도 20%를 웃돌았다.
많은 노동자가 퇴직 직전까지 자신의 고용 상태와 건강이 유지될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가정을 바탕으로 자산 계획을 수립하지만, 이는 자산 관리의 심각한 사각지대를 낳는다. 대다수 미국인이 성공한 조기 은퇴자의 자산 전략을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고 복권 당첨 시 즉시 퇴직을 원한다는 통계는, 역설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조기 은퇴가 가져올 재정적 충격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풀이된다.
시장 변동성에 흔들리는 퇴직연금 계좌의 경고음
미국 최대 자산운용사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Fidelity Investments)가 같은 주에 발표한 1분기 보고서 역시 자산 관리의 지속성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 1분기 미국 퇴직연금(401k·403b) 가입자들의 평균 저축률은 소득 대비 9.6%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업 매칭 기여분 4.8%를 더한 총 저축률은 14.4%에 달해 피델리티의 권장 기준인 15%에 육박했다.
그러나 높은 저축률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4분기 대비 올 1분기 퇴직연금 계좌의 평균 잔액은 오히려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피델리티는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주가 등락에 불안감을 느낀 가입자들이 적립금을 현금화하거나 펀드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손실이 확정됐다는 분석이다. 즉, 저축률보다 중요한 것은 '시장 하락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운용 지속성'이라는 의미다.
샤론 브로벨리(Sharon Brovelli) 피델리티 직장투자부문 사장은 시장 변동성에 흔들리지 않고 기존 투자 전략을 유지하는 자가 최종 자산 형성 과정에서 우위를 점한다고 강조했다.
'소득 단절·자산 묶임·연금 공백'… 한국형 3중 단절 구조의 공포
미국 노동시장의 역설은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한국 경제에 더욱 무거운 과제를 던진다. 통계청이 발표한 고령층 경제활동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4.3세에 달하지만, 주된 일자리에서의 퇴직 연령은 평균 49.4세에 머물러 있다. 이는 한국의 예비 은퇴자들이 무려 35년이라는 긴 세월을 오직 '모아둔 자산으로만 버텨야 하는 구조'에 직면해 있음을 뜻한다.
한국 시장이 미국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이유는 구조적 '3중 단절'에 있다. 첫째, 임금피크제와 상시 구조조정 여파로 '소득은 너무 빨리 끊긴다'. 둘째, 가계 자산의 70% 이상(통계청 기준)이 부동산에 편중되어 정작 쓸 돈은 없는 '자산은 묶여 있는' 상태다. 셋째, 퇴직 후 만 65세까지 이어지는 '국민연금 수령 공백' 기간 동안 소득 공백 메우기가 불가능하다. 퇴직 후 자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자산을 추가로 탕진하는 악순환도 고질적인 리스크다. 국내 금융투자업계 전문가들은 직장과 건강이 퇴직 시점까지 완벽하게 버텨줄 것이라는 금융적 맹신을 버릴 때 비로소 노후 빈곤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노후 파산을 막기 위한 투자자 3대 실행 지표
은퇴 설계는 '언제까지 벌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일 당장 소득이 0원이 돼도 버틸 수 있는가'의 문제다. 국내 예비 은퇴자들과 자산가들이 '백조의 덫'을 피하기 위해 당장 실행해야 할 계량화된 방어 전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은퇴 시점 5년 단축을 가정한 현금흐름 시뮬레이션을 상시 가동해야 한다. 예상보다 5년 빨리 퇴직하고 연간 목표 수익률을 3%로 보수적으로 잡았을 때, 기존 자산 고갈 시점이 몇 년 앞당겨지는지 추산해 부족분을 선제적으로 메워야 한다.
둘째, 최소 12개월에서 최대 24개월 치 생활비 규모의 변동성 완충 자산을 구축해야 한다. 시장 급락기에 생활비 압박으로 인해 가치 자산을 강제 매도해 손실을 확정 짓지 않도록, MMF(머니마켓펀드)·단기채·정기예금 등 즉시 현금화 가능 안전자산을 반드시 분리 예치해야 한다.
셋째, 중대 질병 발생 시 연 소득의 60% 이상을 보전할 보장성 보험의 대체율을 확보해야 한다. 은퇴 초기 예기치 못한 질병은 자산 인출을 가속화하는 주범이므로, 최소 2년의 치료기간 동안 자산 파먹기 없이 치료비와 생활비를 완전히 커버할 수 있도록 진단비 한도를 재정비해야 한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