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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반도체 슈퍼사이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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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전 고려대 교수
금융시장의 역사에서 투자자들을 가장 큰 파멸로 이끌었던 마법의 주문은 언제나 ‘이번에는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였다. 최근 수년간 글로벌 주식시장을 뜨겁게 달구며 천문학적인 자금을 빨아들인 인공지능(AI) 붐, 그리고 이에 발맞춰 이른바 ‘슈퍼사이클’을 구가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대호황 역시 이 치명적인 최면에 기반을 두고 있다. 2022년 말, 챗GPT(ChatGPT)의 등장은 고대역폭 메모리(HBM)라는 새로운 금맥을 발견하게 했고, 이는 곧장 관련 기업들의 주가를 중력의 법칙에서 해방시켰다.
올해 들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는 각각 114%, 186%라는 경이로운 폭등세를 기록했으며, 미국의 마이크론(Micron)과 샌디스크(SanDisk) 역시 140%가 넘는 주가 상승률을 보였다. 시장은 열광했고, 경영진들은 자신감에 차올랐다. 이들은 AI 혁명이 과거 메모리 산업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호황과 불황(Boom and Bust)’의 사이클을 영원히 종식시켰다고 선언했다. 생성형 AI 모델을 고도화하기 위한 하드웨어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할 것이며, 반면 공급은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므로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수년간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시장의 유일한 진리로 자리 잡았다.

자본시장의 최전선에서 온갖 흥망성쇠를 목도해 온 노련한 자산운용가들은 현재의 광기가 뿜어내는 서늘한 이면을 직시하고 있다. 블루박스 자산운용의 윌리엄 드 게일(William de Gale)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메모리 산업이 본질적으로 막대한 자본 지출과 끔찍할 정도의 극심한 변동성을 동반하는 산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사람들이 "메모리 사이클은 끝났고, 이제는 장기적 가치 창출 산업으로 변모했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이, 언제나 끔찍한 불황이 시작되는 변곡점이었다.

현재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에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시나리오만이 선반영되어 있다. 기업들이 과거처럼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한 치킨게임을 벌이거나 과잉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인공지능 수요가 영원히 폭발적일 것이라는 가정, 그리고 현재의 경이로운 영업이익률이 미래에도 고스란히 유지될 것이라는 환상이 그것이다. 하지만 랜모어 자산운용의 앤드루 래핑(Andrew Lapping) 최고투자책임자가 "표범은 자신의 반점을 바꾸지 못한다"고 일침을 가했듯, 높은 수익률이 보장되는 시장에 자본이 몰리고 결국 공급 과잉이 초래되는 자본주의의 근본 원리를 반도체 산업만이 피해 갈 수는 없다.
구글 ‘터보퀀트(TurboQuant)’의 충격,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파괴하다

더욱 치명적인 사실은 낙관론자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던 ‘영원한 수요’라는 전제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 균열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AI 혁명의 선두주자인 구글(Google)에서 비롯되었다. 최근 구글이 발표한 새로운 압축 기법인 ‘터보퀀트(TurboQuant)’는 대형 언어 모델(LLM)을 구동하고 훈련하는 데 필요한 메모리의 양을 무려 6분의 1 수준으로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기술이다.

이는 기술의 효율성 측면에서는 엄청난 혁신이지만,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에게는 전대미문의 ‘수요 파괴(Demand Destruction)’를 의미한다. AI 모델 구동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붓고 있던 오픈AI, 앤스로픽, 구글 등 빅테크 기업들의 가장 큰 목표는 결국 ‘모델의 경량화 및 효율화’다. 하드웨어의 물리적 한계를 소프트웨어 최적화로 뛰어넘는 터보퀀트와 같은 기술이 상용화될 경우, 고가의 HBM 칩을 무한정 사들여야 했던 절대적 수요는 순식간에 증발할 수밖에 없다. 도이치방크는 투자자들이 이러한 "AI 관련 기술의 파괴적 혁신(Disruption)"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실제로 이 기술이 발표된 직후 메모리 공급업체들의 주가가 급락한 것은, 겉보기엔 견고해 보이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단 한 번의 소프트웨어 혁신 앞에서도 얼마나 취약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러한 반도체 사이클의 구조적 균열 앞에서 전 세계 어느 곳보다 가장 위태로운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현재 코스피(KOSPI) 지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단 두 개의 거대 기업에 의해 기형적으로 떠받쳐져 있다. 이 두 기업이 코스피 전체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50%를 상회한다. 최근 한국 증시가 보여준 눈부신 랠리는 경제 전반의 체력 강화가 아닌, 오직 메모리 반도체라는 단일 테마에 글로벌 자금이 과도하게 쏠린(Momentum Crowding) 결과물에 불과하다.
특정 산업에 대한 이토록 극단적인 의존도는 호황기에는 지수를 폭등시키는 엔진이 되지만, 거품이 꺼지는 순간에는 국가 경제 전체를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닻이 된다. 만약 터보퀀트와 같은 기술 혁신으로 인해 빅테크의 메모리 주문량이 감소하고, 공급 과잉 신호가 켜져 반도체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서는 순간, 한국 증시에 몰렸던 글로벌 자금은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이는 곧바로 한국 주식시장 전반의 뱅크런식 투매와 패닉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앞다투어 한국 증시에 대한 경고음을 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탠다드차타드(SC)의 스티브 브라이스(Steve Brice) 글로벌 최고투자책임자는 한국 주식시장의 낙관론이 이미 정점(Peak Optimism)에 달했다고 진단하며, 당장 이익을 실현하고 글로벌 자산으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SK하이닉스 400만 원, 삼성전자 59만 원이라는 비현실적인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이는 군중 심리에 편승한 탐욕의 끝자락에서 흔히 나타나는 전형적인 상투 신호일 가능성이 높다.

영원히 상승하는 자산은 없으며, 기술의 진보는 늘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기존 산업의 파괴를 몰고 온다. 구글의 터보퀀트는 AI 시대의 하드웨어 수요가 무한할 것이라는 오만에 던지는 첫 번째 경고장일 뿐이다. 앞으로 제2, 제3의 메모리 효율화 기술이 등장할 것이며, 이는 거침없이 치솟던 메모리 가격을 빠르게 냉각시킬 것이다.

과거의 사이클은 결코 죽지 않았다. 단지 화려한 AI라는 장막에 가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을 뿐이다. 특히 증시의 절반을 메모리 반도체의 운명에 저당 잡힌 한국의 투자자들은 지금의 호황이 주는 달콤한 취기에서 당장 깨어나야 한다. 폭탄 돌리기의 음악이 멈추기 전에 리스크를 분산하고 이성을 되찾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찾아올 뼈아픈 불황의 겨울 속에서 가장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맹목적인 탐욕을 거두고, 냉정하게 부활하는 사이클을 직시해야 할 때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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