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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러시아-우크라이나 평화협상의 진짜 장애물

영토와 원전, 신뢰 붕괴가 만든 전후 질서 경쟁과 그 질서의 설계가 평화협상을 압도하는 구조적 이유, 그리고 인도태평양 동맹에 주는 경고와 동맹 질서의 시험대에 선 한국
트럼프 미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8월21일 알래스카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AFP/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트럼프 미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8월21일 알래스카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AFP/연합뉴스
전쟁은 멈출 수 있어도 질서는 자동으로 복구되지 않는다. 러시아 미국 우크라이나가 평화 합의가 가까워졌다고 말하는 국면은 전장의 피로가 임계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지만, 그 다음이 안정된 평화일지 불안정한 휴전일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남아 있는 쟁점들은 단순한 조항 조정이 아니라, 전후 질서를 누가 어떤 규칙으로 설계하느냐의 문제로 수렴되고 있다. 영토와 자포리자 원전, 안전보장과 신뢰의 문제는 모두 이 구조적 질문과 연결돼 있다.

본지는 이 글을 통해 미중 장기 패권 경쟁, 미국 대전략의 제약, 유럽의 전략적 공백, 그리고 한국이 안보와 산업에서 전략적 공백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평화 협상의 난제들을 재구성해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의 협상은 전쟁을 끝내는 협상이 아니라 전후 질서를 둘러싼 힘의 배분을 둘러싼 협상이다. 그래서 합의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합의의 성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무거운 것이다.

영토 문제는 땅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 경계의 문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영토 문제는 단순한 경계선 조정이 아니다. 러시아는 점령지를 자국 영토로 고정하려 하고, 우크라이나는 어떤 형태로든 러시아군의 철수가 없는 평화도 국가 소멸의 전조로 받아들인다. 이 간극은 타협의 공간을 좁힌다.

특히 러시아군이 점령한 동부 지역을 둘러싼 논의는 전장과 협상 테이블 사이의 시간차로 인해 더 경직돼 있다. 러시아는 군사적 진전을 정치적 성과로 전환하려 하고, 우크라이나는 방어 거점을 국가 생존의 상징으로 지키려 한다. 상호 철수와 비무장 지대, 국제 감시 같은 절충안이 제시되지만, 이는 러시아에게는 승리 서사의 붕괴로, 우크라이나에게는 국내 정치적 정당성 상실로 이어질 위험이 큰 것으로 평가 받는다.

강대국 충돌형 전쟁의 종결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정의의 완결이 아니라 더 큰 파국을 피하는 제한적 합의가 보통이다. 문제는 그 제한적 합의조차 가능하려면 전선의 안정과 검증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선은 아직 고정되지 않았고, 검증은 신뢰를 전제로 한다. 이 구조적 모순이 영토 문제를 가장 풀기 어려운 난제로 만드는 핵심 요인이다.

자포리자 원전은 전력 시설이 아니라 점령 질서의 시험대다

자포리자 원전이 협상의 핵심 쟁점으로 남는 이유는 규모 때문만이 아니다. 이 원전은 점령과 합법성, 안전과 통치 권한이 한꺼번에 얽힌 상징적 시설이다. 공동 관리나 공동 기업 같은 구상은 실용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점령의 부분 승인이라는 정치적 해석을 피하기 어렵다.

원전 운영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안전 책임의 경계, 전력 배분 권한, 사고 발생 시의 책임 주체까지 모두 문장으로 규정돼야 한다. 여기에 냉각수와 외부 전력, 파괴된 인프라 복구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협상은 단기간에 결론을 내기 어려운 패키지로 변한다.

러시아가 오직 자신만이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기술적 자신감이 아니라 점령 질서를 고정하려는 정치적 언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자포리자 원전에서의 타협은 전후 질서의 승인과 직결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협상의 최종 단계까지 남을 수밖에 없다.

신뢰의 붕괴는 합의를 휴전 장치로 바꾼다


신뢰는 협상에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을 줄이는 장치다. 신뢰가 없을수록 합의문은 감시와 처벌, 강제 조항으로 두꺼워진다. 지금 푸틴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발언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합의 구조를 규정하는 선언에 가깝다.

안전 보장 문제는 이 불신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우크라이나는 재침공을 막는 실질적 보장을 원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우회 확장으로 해석한다. 유럽군 주둔 문제 역시 상징적 패배와 연결되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수용하기 어렵다. 반대로 우크라이나가 실효적 보장 없이 영토를 양보하는 것은 국내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남는 선택지는 보장이 약한 휴전이나 전쟁 지속이다. 두 경우 모두 전후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들며, 합의가 이뤄져도 다음 충돌의 조건을 남긴다.

전후 비용과 민주적 정당성은 협상의 또 다른 전장이다


재건 비용과 러시아 자산 문제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현금 흐름과 금융 질서의 문제다. 동결 자산의 활용은 제재 체제의 신뢰와 직결되고, 러시아로서는 이를 허용할 경우 내부 권력 구조에 충격을 줄 수 있다. 반대로 서방은 법적 정당성과 금융 시스템 안정성을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로서 당연하지만, 전쟁 중 국민투표는 정보전과 분열의 표적이 되기 쉽다. 휴전 기간을 둘러싼 논쟁 역시 같은 맥락이다. 휴전은 정당성의 조건이지만, 동시에 재무장과 재배치의 시간으로 악용될 수 있다. 이 악순환은 협상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평화 협상이 던지는 한국의 전략적 질문


이 전쟁의 종결 방식은 한국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다음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강대국 충돌이 어떻게 끝나는가는 억지의 신뢰를 좌우한다. 한미동맹과 확장억제를 재설계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 모델은 중요한 선례가 된다.

둘째, 자포리자 원전 사례는 전력 인프라가 전시에는 곧 점령 질서의 핵심 자산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이 원전을 경제 산업으로만 다룰 경우, 지정학적 충격에 취약해질 수 있다.

셋째, 전후 복구와 제재, 자산 처리 방식은 글로벌 공급망과 금융 규칙을 바꾼다. 수출과 제조에 의존하는 한국에게 이는 비용 구조의 문제다.

넷째, 미국이 유럽에서 비용을 줄이려 할수록 인도태평양 동맹에 대한 요구는 커질 것이다. 한국은 이를 단순한 부담이 아니라 질서 설계 참여의 기회로 전환해야 한다.

신뢰가 붕괴된 전쟁은 신뢰로 끝나지 않는다. 검증과 강제, 에너지와 산업, 금융과 군사, 국내 정치와 국제 질서가 하나의 합의문에 뒤엉킨다. 지금 남아 있는 까다로운 문제들은 협상을 지연시키는 장애물이 아니라, 전후 질서의 성격을 결정하는 설계 변수다. 한국의 과제는 전쟁의 결과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결과가 한반도와 인도태평양의 억지 구조에 미칠 영향을 선제적으로 설계하는 데 있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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