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핵융합 경쟁에서 드러나는 미국 국가 동원 구조의 한계와 미국과 속도에서 차이를 내고 있는 중국의 국가적 베팅, 한국이 미래 국가 경쟁력인 핵융합에서 선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전략적 창
이미지 확대보기핵융합은 더 이상 먼 미래가 아니다: 에너지 기술에서 패권 경쟁의 시간표로
미국의 핵융합 담론은 오랫동안 “언젠가 올 미래”로 취급돼 왔다. 그러나 지금 핵융합은 더 이상 먼 미래의 과학 실험이 아니다. 핵융합은 AI 시대의 전력 수요, 산업 정책, 공급망 재편과 맞물리며 패권 경쟁의 시간표를 좌우하는 전략 의제로 전환되고 있다.
최근 미국 언론 폭스비즈니스 인터뷰에서 커먼웰스 퓨전 시스템즈의 최고경영자 밥 멈가드는 미국이 또 한 번의 스푸트니크 모먼트를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의 진단은 단순하다. 문제는 기술의 성숙도가 아니라, 핵융합이라는 기회를 국가 전략으로 끌어올려 주도권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와 동원 구조가 미국 정부에 아직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경고는 과장이 아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최근 핵융합 개발이 결정적 단계에 진입했으며 민간 투자 규모도 급격히 늘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AI 전력 수요의 폭증 속에서 핵융합은 단순한 발전 기술이 아니라, 연산 능력과 산업 생산성을 떠받치는 에너지 기반으로 주목받고 있다. 에너지는 더 이상 보조 수단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하부 구조가 되고 있다.
스푸트니크의 교훈은 기술이 아니라 동원 체제였다: 핵융합 경쟁이 재현하는 냉전의 구조
스푸트니크 충격의 본질은 구 소련의 로켓 기술이 미국을 앞질렀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었다. 미국 사회가 경쟁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 더 컸다. 압도적 경제력과 산업 기반을 보유하고도, 특정 영역에서 국가가 집중 동원을 걸 경우 기술 격차가 급격히 좁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은 뒤늦게 깨달았다.
핵융합은 바로 이 조건을 다시 재현하고 있다. 기술 난제가 여전히 크지만, 지금의 판도에서 더 중요한 것은 산업화 난제다. 논문과 실험 성과를 넘어 파일럿 플랜트를 짓고, 부품 공급망을 만들고, 규제와 안전 기준을 정립해 전력 시장에 연결하는 과정이 승부처가 되고 있다. 멈가드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짓고 가동하기 시작했는가를 핵심 지표로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제원자력기구가 말하는 가속 역시 같은 맥락이다. 다수 국가와 민간 자본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하면 기술 성숙도 곡선은 어느 순간 급격히 꺾인다. 한동안은 불가능해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 불가피해 보이는 전환점에 도달한다. 핵융합은 지금 그 문턱에 서 있다.
중국은 핵융합을 국가 산업화 프로젝트로 올렸다: 국가적 베팅이 만들어내는 속도의 차이
이 지점에서 중국은 미국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중국은 국영 원자력 그룹 산하에 핵융합 에너지 회사를 설립하고 대규모 자본을 투입했다. 이는 핵융합을 연구 과제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산업화 프로젝트로 공식 채택했다는 선언에 가깝다.
중국이 핵융합에 국가적 베팅을 거는 이유는 분명하다.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핵융합은 수입 의존도를 낮추는 전략적인 수단이다. 산업 측면에서는 초전도, 극저온, 고자기장 자석, 플라즈마 제어, 고내열 소재 등 첨단 제조 기술의 집합체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한 번 생태계를 장악하면 방산과 우주, 반도체 장비로 파급된다. 여기에 AI 시대의 전력 경쟁이 더해진다. 전력 공급이 연산 능력의 한계를 규정하는 시대에 에너지 혁신은 곧 AI 패권의 기초가 된다.
중국은 이미 실증 장치를 건설하며 경험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핵융합 경쟁에서 결정적 변수는 실험 장치가 아니라 실증 장치의 누적 속도다. 이 축적 속도에서 중국은 미국에 구조적 압박을 가한다.
미국의 취약점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 설계다: 민간 혁신을 가속하지 못하는 정부 구조
미국의 약점은 기술력이 아니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민간 핵융합 생태계를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 프로그램의 형태다. 연구 중심의 낡은 구조가 실증과 확산 단계로의 전환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멈가드가 정부와 민간의 가속 모델을 해법으로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이 가장 잘하는 방식은 민간이 혁신을 만들고, 정부가 규제와 조달, 표준과 인프라로 시장을 확정해 주는 것이다. 핵융합 역시 이 경로를 타야 한다. 그러나 핵융합은 전력 인프라에 연결되는 기술이기 때문에, 정부가 실증과 인허가, 표준의 시간을 단축하지 못하면 민간의 속도도 제한된다.
핵융합의 장점으로 꼽히는 부지 제약의 완화와 인프라 의존도 감소는 동시에 제도적 충돌을 예고한다. 기존 전력시장, 환경 규제, 안전 기준, 금융과 보험 구조가 핵융합에 맞춰 재설계되지 않으면 기술의 장점은 산업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연구비 증액이 아니라 실증과 확산을 위한 제도적 레일의 현대화다.
핵융합은 한국 대전략의 시험대다: 에너지 산업과 안보를 묶는 선택의 시간
핵융합을 단순한 에너지 기술로 보는 시각은 이미 시대에 뒤처졌다. 핵융합은 생산성 체계를 바꾸는 기술이다. AI가 데이터와 연산, 서비스의 결합을 통해 플랫폼 질서를 만들었듯, 핵융합도 산업 표준과 공급망 질서를 형성할 수 있다. 이는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아니라 표준과 제조 체계를 둘러싼 경쟁이다.
첨단 기술들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차단하는 재세계화(reglobalization)의 관점에서 보면 에너지 기술의 공급망은 동맹 질서의 내부 구조가 된다. 핵융합이 산업화될수록 핵심 부품과 소재, 설계 지식, 안전 기준, 실증 데이터는 동맹 블록의 전략 자산이 된다. 반대로 중국이 산업화를 선점하면, 중국은 에너지 기술과 표준의 수출국이 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미국 주도의 표준에 깊이 들어가면 중국과의 관계에서 압박을 받을 수 있고, 중국과 협력하면 미국의 기술 통제망에 걸릴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게 핵융합은 에너지 기술이면서 동시에 외교와 통상, 안보 기술이다.
한국의 대응은 명확하다. 핵융합을 AI와 반도체 전력 전략의 일부로 편입해야 하고, 발전소 운영보다 부품과 소재, 장비 밸류체인에서 표준 공급자 지위를 노려야 한다. 동맹 기반 실증 협력에서 데이터와 표준 논의에 참여하는 공동 설계자로 자리매김해야 하며, 중국과의 협력은 시장 논리가 아니라 위험과 레버리지를 함께 계산하는 전략적 관리 대상이 돼야 한다.
미국이 정부 프로그램의 현대화에 성공하면 핵융합은 동맹형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은 반도체와 배터리에서 축적한 제조 역량을 핵융합 부품 산업으로 확장할 기회를 얻는다. 반대로 중국이 실증과 산업화를 선점하면, 핵융합은 중국의 국가형 표준 권력으로 전환될 수 있고 한국은 다시 한 번 남이 정한 규칙에 종속될 위험에 놓인다.
핵융합 경쟁은 단일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한국이 에너지와 산업, 안보와 외교를 하나의 국가 시스템으로 묶어 운용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리트머스다. 멈가드의 경고는 미국을 향한 것이지만,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술이 아니라 구조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 핵융합은 미래의 에너지가 아니라 미래의 국가 경쟁력 그 자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