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산-기술-금융을 통합한 '전략산업국가 모델' 구축이 동아시아 전략균형의 게임체인저가 되는 이유
이미지 확대보기방위은행 논쟁은 단순한 금융이 아니라 전시 경제 체제로의 이행 여부를 가르는 첫 시험대이다
독일이 새로운 방위은행의 설립을 막아선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금융상품을 거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재세계화 신냉전의 안보 질서 속에서 유럽이 어떤 방식으로 군사력과 산업 기반을 재구성할 것인지, 그 핵심 인프라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관한 첫 번째 거대한 충돌이었다. 유럽이 평시 재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동부 전선의 군사적 압력을 견딜 수 있는지, 아니면 전시 경제에 가까운 구조로 넘어가야 하는지를 드러내는 결정적 장면이기도 하다.
유럽판 방위개발은행 구상이 의미하는 전략적 전환
ERB(유럽재무장은행)와 DSRB(국방·안보·회복력은행)라는 두 구상은 금융기술의 응용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유럽판 세계은행이자 방위산업개발은행을 만들겠다는 발상에 가깝다. 냉전기 미국이 군사력·달러·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IMF)를 하나의 안보·경제 구조로 묶어냈던 것처럼, 유럽도 군사력과 금융 인프라를 통합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은 더 이상 ‘평화 배당’을 누리는 대륙이 아니다. 러시아와의 장기 대치, 동유럽 전선의 방어력 확충, 탄약과 방공망 부족, 장거리 타격 능력의 취약성 등이 동시에 노출되고 있다. 그러나 방위산업은 본질적으로 장기 투자 산업이고, 유럽 각국의 재정은 복지 지출·부채 증가·에너지 위기 등으로 이미 과부하 상태다.
바로 이 간극을 메우는 도구가 트리플 A 등급의 다자 방위은행이다. 소규모 출자를 기반으로 국제 자본시장에서 장기·저금리 자금을 대량으로 조달해 탄약 공장 증설, 방산 설비 투자, 공동 무기체계 조달을 뒷받침하겠다는 구상이다. 유럽연합(EU)이 지난 2023~24년 추진했던 첨단 전략기술·방산·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재정 패키지였던 SAFE(Strategic Technologies for Europe Platform, 유럽전략기술플랫폼)가 국가를 대상으로 한 대출이라면, 방위은행은 직접 기업의 생산능력 확대까지 연결해주는 보다 공세적이고 실질적인 군비금융 실험이었다.
독일이 이 구상을 거부한 표면적 이유와 감춰진 동기
독일은 두 가지 이유를 들며 새 방위은행 창설을 반대했다. 하나는 추가 금융수단을 만들기보다 기존 도구를 신속하게 집행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행정 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이 이미 최상급 신용으로 국채를 발행할 수 있어 다자은행에서 얻을 재정적 이점이 거의 없다는 실리 논리다.
그러나 이 표면적 설명 아래에는 독일 특유의 재정 보수주의와 정치적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에너지 위기, 경기 둔화, 복지 지출 압력, 우크라이나 전쟁 비용이 겹치는 상황에서 독일 정부는 자신이 ‘유럽 전시경제 화’를 승인했다는 비판을 감당할 수 없다. 방위력 강화에는 말로 동의하지만, 그 강화의 재정을 떠받치는 구조적 도구 설립에는 신중함을 넘어 회피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독일이 유럽 금융 질서의 핵심 채권국이라는 점이다. 독일이 직접 국채를 발행하면 시장이 몰려들지만, 방위은행 구조가 만들어지면 조달 이익이 유럽 전역으로 분산된다. 즉 독일은 안보 이익은 나누되 재정적 혜택은 희석되는 구조를 선호하지 않는다. 독일 재무부의 “다자은행을 통해 조달할 이점이 없다”는 발언은 이 현실을 매우 정확하게 반영한다.
재세계화 신냉전 속에서 자유주의 진영이 직면한 구조적 딜레마
이 사건을 보다 큰 국제적 맥락에서 보면 더 선명해진다. 지금 미국의 전략은 명확하다. 유럽의 재래식 방어는 유럽이 맡고, 미국은 인도태평양과 중국 견제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미 국무부가 2027년까지 나토의 재래식 방어 상당 부분을 유럽이 자체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동맹국들에 통보했다는 보도는 이 전략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럽이 이 요구를 실현하려면 정치적 의지, 산업 역량, 재정 인프라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 정치적 의지와 방산 역량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장기 금융 인프라는 여전히 부재하다. 방위은행 설립은 바로 그 공백을 메우는 시도였고, 독일은 이 시도를 사실상 첫 단계에서 차단했다.
냉전기 달러 체제와 미 국채, 나토, 글로벌 군비 구조가 서로 결합해 하나의 질서를 만들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각국이 부채·고금리·인구구조라는 내적 한계에 묶여 있다. 미국이 동맹에게 방위비·재정 부담을 전가하려는 전략은 필연적이지만, 동맹국들은 국내 정치적 이유로 새로운 안보 금융 아키텍처를 만드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금융이 없는 전시체제는 지속될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는 완전한 전시경제 체제로 이동했지만, 유럽은 여전히 평시재정과 전시동원의 중간 어딘가에 멈춰 있다. 병력, 무기, 탄약, 방공망, 장거리 타격체계, 드론, 정보전 능력을 확충하는 일은 단기 예산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방산 설비 투자와 공급망 구축은 장기·저금리 자금이 필요하며, 이는 민간 금융시장만으로는 확보하기 어렵다.
세계은행,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유럽투자은행(EIB)이 인프라 개발을 뒷받침했던 것처럼, 유럽 방위은행은 군사력이라는 공공재를 위한 금융 엔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거부로 유럽은 여전히 강한 군대를 말하면서도 강한 군대를 먹여 살릴 금융 엔진은 마련하지 못한 모순의 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자유주의 진영이 선택해야 할 새로운 전략 방향
이 딜레마를 타개하기 위해 자유주의 진영은 두 단계의 결단이 필요하다. 유럽 내부에서는 독일식 재정 보수주의와 프랑스·동유럽의 안보 위기의식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방위은행을 만들지 않더라도 공동 방산 인프라 펀드, 탄약·방공망 생산 증설을 위한 유럽투자은행 역할 확대, 안보 프로젝트에 대한 재정규율 특례 적용 같은 중간적 해법들이 있다.
핵심은 유럽이 ‘평시 재정의 원칙’을 넘어서 ‘전시 금융의 논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더 큰 차원에서는 미국이 인도태평양과 유럽을 동시에 포괄하는 민주 동맹형 방위금융 체계를 설계해야 한다. 전술핵·미사일방어·정찰자산을 위한 공동 투자, 나토–인도태평양 공동 방위 인프라 은행 설립 등 새로운 구조적 해법이 없으면, 미국의 부담전가 전략은 “자립하라”는 구호에 머물고 실제 능력은 따라오지 않는 위험한 모순으로 남는다.
한국이 얻어야 할 전략적 교훈
독일의 방위은행 거부는 한국에게도 중요한 세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재정 보수주의는 결국 안보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은 이미 국방비를 높였고 방산 수출에서도 새로운 축이 되었지만, 이를 지탱할 방위금융 구조는 아직 체계화되지 않았다. 한국형 국방채, 방위산업개발은행, 한미일 공동 방위인프라 펀드 등 선제적 설계가 필요하다.
둘째, 미국의 전략적 부담 전가가 동아시아에서도 시작될 것이다. 유럽에 “2027년까지 재래식 방어를 맡으라”고 요구한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도 더 큰 재정·군사 부담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그때 한국은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인도태평양판 동맹형 방위금융 구조의 설계자로 나서야 한다.
셋째, 현실주의 세력균형의 관점에서 보면 방위은행 하나도 합의하지 못하는 유럽의 모습은 동맹 억지력의 구조적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정치·재정·여론의 충돌 앞에서 동맹은 언제든 속도가 늦어진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한국은 전술핵 재배치, 한미일 핵기획 심화, 독자 핵무장 능력의 준비 같은 독자 억지 옵션을 전략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방위금융의 공백은 결국 전략 공백으로 돌아온다
독일의 거부는 유럽의 재무장 속도만 늦춘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 진영 전체의 전략적 약점을 드러낸 사건이다. 군사력과 기술력, 동맹의 의지를 말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지속할 금융 구조를 만드는 데에는 서로 다른 정치 논리와 재정 규율이 충돌하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한국은 이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유럽의 지체는 곧 동맹 전체의 지체로 이어지고, 그 충격파는 인도태평양과 한반도에도 파급된다. 지금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하나는 동맹과 공조하는 새로운 방위금융 모델을 선도적으로 설계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현실주의 세력균형의 관점에서 독자 억지력을 준비하는 일이다.
독일의 거부가 유럽의 발목을 잡을수록, 한국은 더 빠르게 전략적 자립과 동맹 기반 방위금융을 결합한 새로운 국가안보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재세계화 신냉전 시대에 한국의 생존과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안정, 그리고 장기적 국익을 동시에 지키는 길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