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컴버블 붕괴 직전 시스코와 판박이… AI 열풍은 영광스러운 어리석음”
이미지 확대보기‘영광스러운 어리석음’… 공급 과잉의 경고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정확히 예측해 명성을 얻은 마이클 버리가 다시 한번 시장의 낙관론에 정면으로 맞섰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버리가 이끄는 사이언 자산운용(Scion Asset Management)은 지난 분기 말 기준으로 엔비디아 주식 100만 주에 대한 풋옵션(주가 하락 시 이익을 얻는 파생상품)을 보유했다. 이는 명목 가치로 약 1억 8700만 달러에 이르는 규모다.
버리는 최근 자신의 뉴스레터 ‘카산드라 언체인드(Cassandra Unchained)’에서 현재의 AI 열풍을 “영광스러운 어리석음(glorious folly)”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공급 측면의 폭식(Supply-Side Gluttony)이 버블의 결정적 징후”라고 지적하며, 과거 닷컴 버블 당시 인터넷 장비 시장을 독점했던 시스코 시스템즈를 소환했다.
당시 시스코는 “모든 사람이 인터넷의 미래는 직선으로 뻗어갈 것”이라고 믿었던 시기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나, 거품이 꺼지며 주가가 90% 가까이 폭락했다. 버리는 “이번에도 그 중심에 시스코와 같은 존재가 있다. 모두를 위한 곡괭이와 삽을 제공하며 확장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그 이름은 바로 엔비디아”라고 꼬집었다. 엔비디아의 현재 상황이 과거 시스코가 겪었던 궤적과 놀랍도록 닮았다는 분석이다.
매출 ‘돌려막기’와 감가상각의 함정
버리가 엔비디아를 겨냥한 근거는 단순히 주가가 많이 올랐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엔비디아의 수익구조와 AI 산업 생태계 전반에 깔린 ‘구조적 위험’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버리는 소셜미디어 엑스(X, 옛 트위터)와 뉴스레터를 통해 ▲현실과 괴리된 감가상각 일정 ▲칩과 자금이 원형으로 순환하는 기형적 거래 구조 ▲조 단위 하드웨어보다 더 빨리 붕괴하는 하드웨어 주기 등을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특히 그는 빅테크 기업과 AI 스타트업 간의 ‘주고받기(give-and-take)’식 거래를 문제 삼았다. 클라우드 대기업이 AI 스타트업에 자금을 투자하고, 그 스타트업은 다시 그 돈으로 엔비디아의 칩을 대량 구매하거나 클라우드 기업의 서버를 임대하는 방식이다. 버리는 이 과정에서 매출이 부풀려지고 있으며, 이는 실질적 경제 수요가 아닌 금융 공학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또한, 버리는 엔비디아의 주식 기반 보상과 자사주 매입 정책에 대해서도 날을 세웠다. 그는 이러한 정책이 주주 가치를 희석하는 비용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아, 회사가 보고하는 수치보다 실제 비용 부담이 훨씬 크다고 주장했다.
버리의 시각에서 엔비디아의 5조 달러(약 7300조 원)를 넘나드는 기업 가치는 완벽한 실행에 따른 보상이 아니다. 이는 하이퍼스케일러(대형 데이터센터 운용사)들이 닷컴 버블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수년 내에 AI 칩과 데이터센터에 3조 달러(약 4390조 원) 가까운 자금을 쏟아부을 수 있다는 ‘위험한 베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엔비디아 “재무 건전” 반박에도… 버리 “풍선 터뜨리기 멈추지 않아”
엔비디아 측은 즉각 반발했다. 회사 측은 애널리스트들에게 보낸 메모를 통해 “버리의 자사주 매입 계산법은 틀렸다”고 반박하며, 회사의 사업은 “경제적으로 건전하고 보고는 투명하다”고 강조했다. 논란이 된 순환 출자식 매출에 대해서도 “전략적 투자가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일부이며, 투자를 받은 기업들도 대부분 수익을 외부 고객에게서 창출한다”고 해명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역시 실적 발표회에서 AI 버블론을 일축했다. 그는 “우리가 보는 관점에서는 (버블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며 수요가 계속해서 강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엔비디아 주가는 실적 호조에 힘입어 최근 고점 대비 12%가량 조정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시장의 주도주로 남아있다.
그러나 버리는 자신의 분석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는 “공급은 재앙적일 정도로 과잉인데 수요는 그에 미치지 못했던” 닷컴 시대의 붕괴 원인이 이번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고 본다. “이번엔 다르다”는 시장의 맹신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버리는 투자의 대가 찰리 멍거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뉴스레터를 마쳤다.
“돌아다니며 풍선을 많이 터뜨린다면, 그 방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시장의 집단적 환호 속에 홀로 ‘위험’을 경고하며 비난받을지라도, 자신이 목격한 거품 붕괴의 징후를 결코 외면하지 않겠다는 버리의 결기가 읽히는 대목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