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튬이온 배터리·VLS 기술 우위에도 금융·현지화 전략 미흡 뼈아파…나토 연대 프레임 돌파가 관건
이미지 확대보기폴란드 패배, 발트해 특수성과 현지화 전략 간과했나
폴란드 정부는 지난 26일 오르카 프로젝트 우선협상대상자로 스웨덴 사브를 선정했다.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이 제안한 KSS-III급 잠수함은 납기 준수 능력과 가성비를 앞세웠지만, 발트해라는 특수작전 환경을 간과한 것이 치명타였다.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스웨덴 A26 잠수함을 "발트해 작전 환경에 최적화된 유일한 제안"이라며 "폴란드 산업에 대한 광범위한 투자 약속"을 선정 이유로 꼽았다.
평균 수심 55m에 불과한 발트해에서는 3000t급 이상의 대형 잠수함보다 중소형 잠수함이 전술적으로 유리하다. A26은 고스트 모드와 특수 코팅 기술로 얕은 바다 매복 능력을 극대화했다. 반면 태평양 대양 작전에 최적화된 KSS-III는 폴란드 해군에 과잉 스펙으로 비쳤을 가능성이 크다.
더 결정적이었던 것은 현지화 전략이다. 사브는 폴란드 국영 방산그룹 PGZ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잠수함 전 수명주기에 걸친 광범위한 기술 이전을 약속했다. 폴란드 조선소를 유럽 내 잠수함 정비 거점으로 육성하겠다는 비전이 단순 기술 이전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평가다.
캐나다 600억 캐나다 달러 시장, 한·독 혈투 예고
캐나다 순찰 잠수함 프로젝트는 최대 12척 규모로 600억 캐나다 달러(약 62조 원)에 이르는 초대형 사업이다. 한국과 독일 TKMS의 양강 구도로 재편됐다.
캐나다는 태평양과 대서양, 북극해라는 3면의 광활한 바다를 지켜야 한다. 특히 기후 변화로 북극 항로가 열리면서 러시아와 중국의 북극해 진출이 가시화되자, 캐나다 정부는 차기 잠수함의 핵심 요건으로 '빙하 하부 작전 능력'과 '긴 항속 거리'를 못 박았다.
빙하 아래에서는 디젤 엔진 가동을 위한 공기 흡입이 불가능하다. 잠수함은 오로지 배터리에 의존해 장시간 잠항해야 하며, 비상시 두꺼운 얼음을 깨고 부상할 수 있는 강력한 추진력이 필요하다.
△ 리튬이온 배터리의 결정적 우위
한화오션의 KSS-III Batch-II는 세계 최초로 리튬이온 배터리 시스템을 실전 배치한 잠수함이다. 수중 배수량 4000톤급 대형 선체에 리튬이온 배터리는 기존 납축전지 대비 에너지 밀도가 2배 이상 높아 빙하 아래 장시간 잠항이 가능하며, 고속 기동 시 전압 강하가 적어 얼음을 깨고 부상하거나 적을 추격하는 데 필요한 순간 출력을 안정적으로 제공한다.
수직발사관 탑재 능력도 승부처다. KSS-III는 설계 단계부터 6~10개 수직발사관을 갖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나 순항미사일 운용이 가능하다. 이는 캐나다가 원하는 적대 세력에 대한 억제력을 제공하는 강력한 비대칭 전력 투사 수단이다.
△ 독일의 나토 카드와 노르웨이 레퍼런스
독일도 만만치 않은 카드를 쥐고 있다. TKMS가 제안하는 212CD 형은 2500~2800t급으로 수소 연료전지 AIP 시스템을 주력으로 한다. 정숙성과 스텔스 형상 설계에서는 정평이 나 있지만, 리튬이온 배터리 통합 및 대형 선체 적용 경험에서는 한국에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직발사관도 없어 전략 타격 능력에서 명확히 뒤진다.
그러나 TKMS는 최근 노르웨이 해군과 Type 212CD 4척 계약을 체결하며 북유럽 시장에서 교두보를 확보했다. 노르웨이 역시 북극해 인접 국가로, 이 계약은 독일이 북극 작전 환경에서도 검증된 파트너임을 입증하는 강력한 레퍼런스가 됐다.
더욱 위협적인 것은 '유럽·나토·캐나다 연대' 프레임이다. 독일은 캐나다가 나토 회원국이자 파이브 아이즈 정보 동맹국임을 강조하며, 유럽 방산 생태계와의 긴밀한 협력이 장기적으로 캐나다에 유리하다고 설득하고 있다. 폴란드가 스웨덴을 선택하며 "발트해 안보 동맹 강화"를 내세운 것처럼, 캐나다 역시 나토 북부 전선의 결속을 중시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은 '현지화 부족'이다. 독일은 이미 수십 년간 유럽과 나토 국가들에 잠수함을 공급하며 쌓은 신뢰와 유지보수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캐나다 내 방산 협력 기반이 취약하다.
이 약점을 메우기 위해 한화오션은 캐나다 잠수함 정비를 전담하는 영국계 밥콕 캐나다와 전략적 협력 계약을 맺었다. 밥콕은 현재 캐나다 해군의 빅토리아급 잠수함 유지보수를 수행하며 캐나다 해군과 깊은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 협력은 캐나다 국방 조달의 핵심인 '산업적 기술 혜택(ITB)' 정책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영연방 안보 네트워크 안에서 한국 잠수함이 '신뢰할 수 있는 자산'으로 인증받는 효과를 노린다.
필리핀·그리스, 금융 패키지와 전략 타격 능력 경쟁
필리핀은 남중국해에서 중국 견제를 위해 800억~1100억 페소(약 1조9900억~2조7400억 원)를 투입해 사상 첫 잠수함 2척을 도입한다. 현재 프랑스 나발그룹의 스코르펜급, 스페인 나반티아의 S-80급, 한화오션의 KSS-III 기반 모델이 최종 3파전을 벌이고 있다.
프랑스는 단순한 잠수함 판매를 넘어 필리핀 해군의 잠수함 운용 생태계 전체를 구축해주겠다는 종합 패키지를 제시했다. 나발그룹은 스코르펜급 2척과 함께 수빅만 해군기지의 잠수함 전용 시설 확장 개발, 필리핀 해군 승조원 훈련, 잠수함 부대 창설 자체를 돕는 소프트웨어 지원을 약속했다. 프랑스 정부는 2023년 9월부터 주필리핀 대사를 통해 필리핀 정부와 직접 대화를 시작하며 정부 차원의 저리 차관 제공을 카드로 내걸었다.
스페인 나반티아는 더욱 파격적인 금융 조건을 제시했다. 공기불요추진(AIP) 탑재 S-80급 2척 공급과 함께 총 계약금의 100% 대출에 대해 스페인 정부가 주권 보증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대금은 필리핀 해군에 첫 번째 잠수함이 인도된 후에 지급하면 된다. 필리핀 정부의 재정 부담을 사실상 제로로 만드는 조건이다.
한화오션은 인도네시아에 수출한 실적과 한국 해군이 운용 중인 도산안창호급의 입증된 성능을 내세우며 KSS-III 기반 'KSS-III PN' 모델과 1400t급 패키지를 제안했다. 잠수함 기지 건설, 정비센터 설립, 시뮬레이터 훈련 시스템 등 토털 솔루션도 포함했다. 이미 필리핀 공군이 운용 중인 FA-50 경공격기의 성공적인 사례도 신뢰 자산이다.
그리스는 라이벌 튀르키예 견제를 위해 기존 214급 잠수함 4척 현대화와 신형 4척 도입을 추진 중이다. 핵심 요구사항은 1000킬로미터 이상 장거리 순항미사일 능력이다.
KSS-III의 수직발사관은 설계 단계부터 6~10개가 탑재돼 있어, 어뢰발사관을 쓰지 않고 별도로 한국형 순항미사일 '천룡'이나 탄도미사일 '현무-IV' 계열을 발사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가 원하는 전략적 억제력을 가장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솔루션이다.
프랑스는 스칼프 네이벌(MdCN) 순항미사일을 제안하지만, 어뢰발사관을 통해 발사하는 방식이라 잠수함 통합 비용이 높고 발사관 수량 제약을 받는다. 독일은 기존 214급 플랫폼 개량을 제안하지만 VLS 탑재 경험이 부족하다.
K-방산 승리 위한 5대 전략 재설계 절실
폴란드 오르카 프로젝트 패배는 한국 방산이 '기술 우위'만으로는 글로벌 메이저리그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일깨웠다. 방산 전문가들과 업계는 다음 5가지 차원에서 근본적인 전략 재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첫째, 금융 패키지 혁신: 민관 합동 '방산 수출 금융 플랫폼' 구축이다.
수출입은행 자본금 한도가 25조 원으로 늘었지만, 캐나다·필리핀·그리스 등 초대형 사업이 동시다발로 진행될 경우 여전히 부족하다. 유럽 국가들이 정부 차원의 주권 보증과 EU 금융 지원을 무기로 삼는 상황에서, 한국은 수출입은행 단독 체제를 벗어나야 한다.
구체적으로 산업은행·기업은행·시중 은행이 참여하는 '신디케이트론' 구성, 대외경제협력기금(EDCF)과 공적개발원조(ODA) 연계 방안, 국부펀드 참여 유도 등 다층적 금융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특히 필리핀처럼 재정 여력이 부족한 국가에는 잠수함 기지 건설을 ODA 사업으로 추진하고, 잠수함 도입은 별도 차관으로 지원하는 창의적 패키지가 필요하다.
둘째, 현지화 2.0이다. '일자리 창출 파트너'로 입지를 굳혀야 한다.
사브가 폴란드에서 보여준 승리 공식은 명확하다. 현지 기업을 단순 하청업체가 아닌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로 육성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한국도 캐나다 밥콕, 필리핀 아길라, 그리스 스카라망가스 조선소 등과 사실상 '운명 공동체' 수준의 결합을 추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현지 조선소를 아시아·태평양 지역 잠수함 정비 허브로 육성하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하고, 핵심 부품 현지 생산 및 제3국 수출 권한 부여, 공동 R&D 센터 설립 등을 통해 현지 정치인들이 "한국 잠수함 선택이 곧 자국 일자리 창출"임을 유권자에게 자랑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셋째, 맞춤형 작전 솔루션이다. '스펙 경쟁'에서 '방어력 강화 제안'으로 가야 한다.
폴란드는 '발트해 매복 능력'을 샀고, 캐나다는 '북극해 생존 능력'을 사려 한다. 한국은 단순히 "우리 배터리가 더 오래간다"는 스펙 나열을 넘어, 구체적인 운용 시나리오와 교리를 제안해야 한다.
캐나다에는 '빙하 아래 3주간 SSBN 추적 작전' 시나리오와 북극해 전용 훈련 프로그램을, 그리스에는 VLS 기반 '1000km 전략 타격 시나리오'와 시뮬레이션 훈련을 패키지로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해군의 실전 운용 데이터와 노하우를 최대한 공유하고, 필요시 한국 해군 교관단 파견도 검토해야 한다.
넷째, 면밀한 안보 동맹 외교 활성화다. '판매자'에서 '안보 제공자'로 신뢰를 다져야 한다.
잠수함은 국가의 전략 자산이다. 잠수함을 구매한다는 것은 판매국과 수십 년간 안보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서약이다. 한국 정부는 단순한 '세일즈 외교'를 넘어 전략적 차원의 안보 협력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캐나다와는 '한국-캐나다 북극 안보 파트너십' 선언을 통해 북극해 정보 공유와 연합 훈련을 약속하고, 필리핀과는 '인도-태평양 해양 안보 연대' 구축을 천명해야 한다. 그리스에는 튀르키예 견제를 위한 양국 간 전략적 협력 강화를 제안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대통령·국방부 장관·외교부 장관이 참여하는 '방산 수출 전담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정부 차원의 총력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끝으로, 기술 통제 선제 대응이다. 미국·나토와 사전 조율은 필수다.
잠수함 수출에는 민감한 기술 통제 이슈가 따라온다. 특히 VLS 탑재 잠수함이나 리튬이온 배터리 같은 첨단 기술은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의 우려를 살 수 있다. 한국은 수출 협상 단계부터 미국 국방부·국무부와 긴밀히 협의하며 기술 이전 범위와 최종 사용자 통제 방안을 투명하게 공유해야 한다.
특히 캐나다는 파이브 아이즈 회원국이므로 한국의 잠수함 수출이 미국 주도 동맹 네트워크 강화에 기여한다는 점을 적극 부각해야 한다. 필리핀 역시 미국의 주요 조약 동맹국이므로, 한국 잠수함 도입이 인도-태평양 전략에 부합한다는 논리를 미국과 공유해야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건조 능력과 리튬이온 배터리 기술, 강력한 화력 플랫폼에 정교한 금융·외교·현지화 전략을 더한다면, 발트해에서 잃은 자존심을 북극해와 대양에서 되찾을 수 있다는 게 업계의 기대와 전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