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바이오 자국주의' 순풍…가동 전부터 10년치 수주 확보
론자·삼성 제치고 미국 시장 선점…덴마크·일본으로 생산망 확대
론자·삼성 제치고 미국 시장 선점…덴마크·일본으로 생산망 확대

25일(현지시각)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후지필름은 지난 24일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 홀리스프링스에 있는 신규 바이오 의약품 공장의 준공식을 열고 내부 시설을 공개했다. 이 공장은 제약사한테서 의약품 생산을 위탁받는 개발·제조 위탁(CDMO) 거점으로는 미국 안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총 32억 달러(약 4조4803억 원)를 들여 지은 이 공장은 '도쿄 타워가 통째로 들어갈 만한' 길이의 복도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건물이 선 구조다.
올해 말 가동을 앞둔 동쪽 건물에는 고기능 항체약, 면역 관련 질환 치료제 등의 주성분을 배양하고 세포를 증식시키는 데 필요한 크고 작은 탱크 약 200기가 들어섰다. 이 가운데 핵심 설비는 건물 3개 층 높이에 이르는 2만 리터 용량의 대형 동물 세포 배양 탱크다. 올해 안에 가동하는 탱크 8기만으로 한 해 최대 5000만 회분의 바이오 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다. 후지필름의 이이다 도시히사 이사는 "세계적인 제약사들의 연 매출 10억 달러(약 1조4000억 원) 이상 블록버스터 의약품을 안정적으로 양산하는 핵심 기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동도 전에 '완판'…미중 갈등이 부른 '나비효과'
신공장을 향한 시장의 반응은 뜨겁다. 2025년 가동 물량은 이미 모두 계약돼 '완판'됐다. 미국의 리제네론 파마슈티컬스와 10년간 30억 달러(약 4조2000억 원), 존슨앤드존슨과는 10년간 20억 달러(약 2조8000억 원) 규모의 장기 생산 계약을 맺어 안정적인 물량을 확보했다.
2028년까지 같은 규모의 탱크 8기를 추가로 설치해 총 16기 체제로 확대할 예정인데, 증설하는 탱크 8기 가운데 절반인 4기 물량 역시 벨기에의 바이오 제약사 아르젠엑스를 비롯한 고객사들이 이미 계약을 마쳤다. 이처럼 주문이 쇄도하는 배경에는 미중 갈등으로 대표되는 지정학 환경 변화가 크게 작용했다.
미국 정부는 바이오 의약품을 전략 물자로 여기고, 생명과 직결된 핵심 품목의 해외 의존도를 줄이며 생산 시설을 자국으로 되돌리는 '리쇼어링'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특히 중국을 공급망에서 빼려는 움직임이 의회 차원에서 뚜렷해지면서, 세계적인 제약사들은 위험 관리 차원에서 중국계 CDMO 기업과의 거래를 꺼리는 추세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바이오 의약품 시장이다. 시장조사업체 그랜드뷰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 세계 바이오 의약품 시장(4522억 달러)의 절반을 북미 지역이 차지한다. 하지만 미국은 이 분야에서 2024년 기준 약 492억 달러(약 68조8800억 원)의 무역 적자를 기록할 만큼 수입 의존도가 높다. 트럼프 행정부의 의약품 관세 인상 가능성까지 더해지면서, 미국 안에 생산 체제를 갖추려는 제약사들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지고 있다. 이에 착실한 투자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국 시장에서 믿을 만한 생산 파트너로 자리 잡으려는 후지필름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경쟁사 앞선 '선점 효과'…'TSMC 성공 공식' 따른다
바이오 의약품 공장은 부지 선정부터 실제 가동까지 보통 5년 이상이 걸려 시장에 빠르게 뛰어들기 어렵다. 경쟁사 론자가 올해 스위스 로슈 그룹한테서 미국 공장을 12억 달러(약 1조 6800억 원)에 인수했지만, 기존 설비를 현대화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역시 생산 역량이 한국에 쏠려 있어 미국 내 대규모 생산에는 한계가 있다. 후지필름이 당분간 미국 시장에서 '선점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는 까닭이다.
후지필름의 전략은 반도체 산업의 TSMC를 빼닮았다. 바이오 의약품은 유전자 재조합 단백질, 세포 치료제, 항체-약물 복합체(ADC)처럼 만들기가 까다로운 차세대 의약품 수요가 급증하는 분야로, 높은 기술력을 갖춘 CDMO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후지필름은 2011년 CDMO 사업에 뛰어든 뒤 현재까지 누적 투자액 1조 엔(약 9조 4178억 원)을 넘기며 시장 지배력 강화에 힘쓰고 있다.
후지필름의 고토 데이이치 사장은 "궁극적으로 생산 능력만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TSMC가 수많은 수주를 통해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췄듯, 우리도 개발과 생산 양면에서 최고의 역량을 확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미국 공장 가동은 후지필름의 세계 CDMO 망 확장의 신호탄이다. 회사는 2028년까지 미국과 덴마크에 있는 CDMO 설비를 꾸준히 확장해, 총 36기가 넘는 동물 세포 배양 탱크를 갖춤으로써 북미와 유럽을 아우르는 최대 규모의 위탁 생산망을 구축할 계획이다. 또 일본 안의 후지필름 도야마화학 공장에도 2027년 가동을 목표로 새로운 CDMO 시설을 짓고 있다. 이는 미국 정부의 정책에 발맞추는 것을 넘어, 세계 바이오 의약품 공급망의 핵심 기업으로 뛰려는 후지필름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