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반도체 본토 귀환' 외치지만…美 기업은 파운드리에 의존
TSMC 美 투자 확대?…관세 폭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
TSMC 美 투자 확대?…관세 폭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

최근 세계 반도체 시장의 무게 중심은 북미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2024년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6276억 달러(약 912조4048억 원)로 전년 대비 19.1% 성장했으며, 특히 북미 지역 출하량은 31%를 기록하며 최대 시장으로 부상했다. 이는 전년 대비 무려 44.8%나 급증한 놀라운 수치다.
이처럼 가파른 성장세는 데이터센터의 폭발적인 수요 증가가 이끌었다. 2024년 PC, 스마트폰 등 일반 전자 기기 수요는 다소 주춤했으나, 데이터센터 투자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반도체 시장 전체의 성장을 견인했다. 전통적으로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국은 중국이었지만, 2024년에는 GAFAM(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의 데이터센터가 밀집한 북미 지역이 중국을 제치고 최대 소비 지역으로 올라선 것으로 분석된다.
◇ 美, 반도체 자급률 10~15%…TSMC 유치에 사활
미국은 반도체 자급률 확대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으나, 오야마 대표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짚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주요 반도체 기업의 생산 거점 및 장비 출하량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미국 내 반도체 생산량은 세계 시장의 10~15% 수준으로 추정된다. 미국 정부는 자국 생산 비중 확대를 목표로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지만, 미국 기업만으로는 목표 달성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반도체 기업 중에는 인텔, 마이크론,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등이 미국 내 대규모 생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인텔은 경영난 속에 제조 부문 분사를 결정했으며, 텍사스 인스트루먼츠는 아날로그 반도체 불황으로 투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마이크론은 메모리 시황 호조에 힘입어 투자를 늘리고 있으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선두 기업과의 격차를 좁히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 미국 정부가 주목한 기업이 바로 대만 TSMC다. 애플, 엔비디아, 브로드컴, 퀄컴, AMD 등 TSMC에 생산을 위탁하는 미국 기업이 상당수이며, TSMC 생산 시설은 대부분 대만에 집중돼 있다. 미국 정부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고려해 TSMC의 미국 내 생산을 적극적으로 유도해왔다. 막대한 보조금을 약속하며 TSMC를 설득한 끝에 지난 1월 TSMC 미국 공장 양산이 마침내 시작됐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미국 내 생산 비용이 높다는 점을 들어 초기에는 난색을 보였지만, TSMC의 주요 고객이 북미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 진출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TSMC 전체 매출의 70%가 북미 지역에서 발생한다.
◇ 보조금 대신 관세 카드?…TSMC 미국 투자 확대 배경
하지만 지난 1월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직후, 반도체 정책 기조는 보조금 중심에서 관세 부과로 급격히 방향을 틀고 있다. 미국 정부가 반도체 수입품에 25% 관세 부과를 검토하면서, TSMC의 대만 생산 제품까지 관세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 우려가 업계에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 TSMC는 지난 3월 4일 1000억 달러(약 145조4100억 원)에 달하는 미국 추가 투자 계획을 발표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웨이저자 TSMC 회장이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투자 계획을 공식 발표하자, 외신들은 TSMC의 전격적인 미국 투자 확대 배경에 관세 정책을 피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오야마 대표 또한 "TSMC의 이번 결정에 미국의 관세 정책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면서도, 과연 TSMC가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 미국에 최첨단 공장을 건설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라고 전망했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미국 내 생산의 구조적 문제점을 언급하며 "대만에는 제조업에 헌신하는 우수 인력이 넘쳐나지만, 미국은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TSMC 미국 공장 건설 프로젝트는 초기 예상과 달리 총 투자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며, 모리스 창 창업자는 "미국 정부 보조금은 단기적인 미봉책일 뿐, 장기적인 비용 부담을 해결할 수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잇따른 비관론 제기가 미국 정부를 압박해 추가 보조금을 확보하려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해석도 제기됐다.
미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인건비를 자랑하는 국가다. TSMC 애리조나 공장 양산이 늦어진 근본적인 원인 역시 인력난이었다. 일본보다 훨씬 높은 임금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인력을 제때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이러한 뿌리 깊은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설상가상으로 트럼프 정부는 보조금 지급에도 극히 소극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TSMC는 사실상 자체 자금으로 막대한 투자를 감당해야 하는 실정이다. TSMC 미국 공장이 본격적인 양산 체제를 구축하는 시점은 빨라야 2029년, 늦으면 2030년 이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1월 1공장 양산이 시작되기는 했으나, 현재 생산 능력으로는 폭증하는 미국 내 반도체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반도체 양산 규모를 단기간에 끌어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TSMC는 상당 기간 대만 생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오야마 대표는 내다봤다. 그렇다면 만약 미국 정부가 대만 생산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한다면 어떤 파장이 예상될까?
◇ 반도체 관세 부과 시나리오별 파급 효과는?
TSMC의 최대 고객사인 애플의 경우, TSMC가 생산한 반도체 대부분은 아이폰 생산 기지인 중국 훙하이정밀공업(폭스콘) 공장으로 공급된다. 미국 수출품이 아니므로 관세 부과 대상에서는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로 큰 고객사인 엔비디아는 데이터센터향 매출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 TSMC 생산 반도체의 미국 수출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만약 25% 관세가 현실화되면, 엔비디아 GPU 가격은 25%나 상승해 결국 미국 소비자들의 부담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퀄컴은 중국 등 아시아 시장 매출 비중이 80~90%에 달해 훙하이정밀공업 등 EMS(전자제품 생산 서비스) 업체나 스마트폰 제조사에 공급하는 반도체는 관세의 직접적인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브로드컴 역시 IT 인프라 장비향 매출이 주력이지만, 생산 기지의 80%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분산되어 있어 미국으로 수출되는 완제품 물량은 상대적으로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AMD는 PC와 데이터센터향 매출 비중이 유사하며, 미국 데이터센터향 비중이 50%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AMD는 반도체 수출 물량의 절반가량이 25% 관세의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 "관세 부과는 美 경제에 악영향 불가피"
오야마 대표는 "반도체를 완제품 형태로 미국에 수출할 때 25% 관세가 부과된다면, 기업들은 즉각적으로 중국, 동남아 등에서 보드나 시스템 형태로 완제품을 조립해 미국으로 우회 수출하는 전략을 택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짚었다. 미국 정부가 완제품에까지 고율 관세를 적용하는 강수를 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시나리오로 전개되든, 최종적인 관세 부담은 고스란히 미국 소비자들에게 전가될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1년 안에 관세율이 25% 이상으로 인상될 경우, 미국 경제 전반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미국 소비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관세 폭탄'을 감수하며 최신 아이폰을 구매해야 하는 암울한 상황이 현실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이 미국으로부터 반도체 산업을 강탈했다"고 주장하며 반도체 산업의 '본토 귀환'을 거듭 외치고 있지만,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인 AMD를 제외한 대부분의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자체 생산 시설 없이 TSMC와 같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에 생산을 아웃소싱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택한 지 오래다. 다시 말해 대만이 미국 반도체 산업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미국 기업 스스로 생산 경쟁력을 포기하고 파운드리 모델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는 의미다.
인텔의 심각한 경영 부진 역시 대만 기업과는 무관한 자업자득의 결과라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책임을 대만 기업에 전가하는 것은 어불성설로 비춰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중적 인지도가 매우 높은 만큼, 그의 발언과 행동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언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다. 오야마 사토시 그로스버그 합동회사 대표는 "반도체 관세 부과 정책은 미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초래하고, 최종적으로 미국 소비자들의 부담만 가중시키는 '악수'"라고 단언했다. 미국 내에서도 거센 비판 여론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 미국의 정치, 경제 상황은 예측 불허의 혼돈에 빠져 있어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