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부모는 내 아이가 남다르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 믿음을 확인해줄 증거를 찾다 보면, 요즘은 자연스레 AI앱 하나가 손에 쥐어진다. 화면 속 캐릭터는 아이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아이 수준에 맞춰 스스로 난이도를 조절하고, 정답을 맞히면 다정한 목소리로 칭찬까지 건넨다. 부모의 눈에는 그 어떤 학습지보다 정교하고 헌신하는 선생님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정교함이 정말 사람의 가르침과 같은 것일까. 아니, 같은 결과를 낳기는 하는 것일까.
2026년 1월, 미국 주니아타대학(Juniata College), 버펄로대학교(University at Buffalo), 포덤대학교(Fordham University),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공동 연구진이 이 질문을 실제 실험으로 옮겼다. 대형언어모델(LLM)로 만든 대화형 AI 캐릭터 '보보(Vovo)'를 열 가정에 여섯 주간들여보내고, 3세에서 7세 사이 아이들이 보보와, 그리고 부모와 각각 같은 순서로 단어를 배우게 한 뒤 그결과를 비교했다. 발음을 확인하고, 뜻을 설명하게 하고, 문장을 만들어보게 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되짚어주는 것까지, 동일한 방식의 대본을 수행했다.
수업을 얼마나 정확한 순서로 진행했는가, 이 한 가지 기준만 놓고 보면 보보와 부모 사이에 뚜렷한 차이는 없었다. 보보는 지치지 않고 매번 같은 원칙으로 일관되게 가르쳤다. 그런데 아이가 실제로 얼마나 배웠는가를 따져보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부모와 함께한 세션에서 아이들의 학습 성과가 통계상 뚜렷하게 더 높았다. 같은 대본, 같은 순서로 가르쳤는데도, 그 결과는 사람과 기계 사이에서 갈렸다.
영상을 하나하나 뜯어본 연구진은 그 단서를 찾아냈다. 보보는 아이의 발음이 조금만 뭉개져도 잘못 알아들었고, 아이가 생각하느라 잠시 멈춘 침묵과 흥미를 잃고 딴청 피우는 침묵을 구분하지 못했다. 심지어아이가 흥미를 보이지 않으면, 보보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대로 수업을 끝내버렸다. 반면 부모는 아이가힘들어할 때 다독이거나, 아이의 표정과 몸짓을 살피고, 눈맞춤·미소·박수·제스처·격려로 반응을 조절했다.보보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설명하고 다정한 말투로 칭찬도 아끼지 않았지만, 발음을 가르칠 때 입 모양을보여주거나 어려운 음절을 짚어 반복시키는 일은 하지 못했다.
2026년 7월, 그리스 테살리아대학교(University of Thessaly)의 한 연구자는 보보 하나의 사례를 넘어서는 질문을 던졌다. 아이 하나, 프로그램 하나에서 드러난 이 간극이 혹시 업계 전체에 깔린 구조적인 문제는 아닐까 하는 물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취학·초등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AI 기반 맞춤형 학습 게임 연구를 지난 십년간 발표된 것까지 모두 찾아 나섰다. 아홉 개 학술 데이터베이스에서 5000여 편의 문헌을걸러내 최종 열아홉 편을 추리고, 각 프로그램이 실제로 무엇을 조정하는지, 아이의 어떤 반응을 근거로 그 조정이 이뤄지는 지, 그리고 그 결과 아이가 얼마나 더 배우고 더 즐거워했는 지를 하나하나 뜯어봤다.
결과는 보보의 사례와 같은 지점을 가리켰다. 열아홉 편 가운데 열한 편이 수학에 몰려 있었는데, 이는 적응형 기술이 정답과 오답이 명확히 갈리는, 계산하기 쉬운 영역에서만 집중적으로 검증돼 왔다는 뜻이다.게다가 열여섯 편은 상용 제품이 아니라 연구자가 직접 만든 실험용 프로그램이었다. 다시 말해 시중에 파는 앱이 아니라, 연구자가 처음부터 아이 맞춤형으로 설계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에서 만든 프로그램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아이 맞춤형'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문제가 어려운지 쉬운지 뿐 아니라 그 문제를 감싸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정답을 맞혔을 때 어떤 보상을 주는 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는 지, 다른 캐릭터와 어떻게 협력하게 하는 지까지 아이마다 다르게 설계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부분까지 진짜로 아이에 맞춰 바꾼 연구는 열아홉 편 가운데 단 네 편뿐이었다. 나머지 열다섯 편은 아이가 문제를 잘 맞히면 다음 문제를 조금 어렵게, 못 맞히면 조금 쉽게 내주는 정도로만 조정했을 뿐, 그 문제를 둘러싼 게임의 틀과 보상 방식은 모든 아이에게 똑같았다. 처음부터 아이에게 맞춰 만들 수 있었던 연구자들의 실험조차 이 정도였다면, 지금 아이들 손에 들려 있는 상용 앱들이 내세우는 '맞춤형'이라는 말은 얼마나 더 헐거운 것일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편, 열아홉 편을 통틀어, 아이가 감정을 나누고 관계를 맺는 능력을 다룬 연구는 없었다. 적응형 시스템이 아이의 관계 형성이나 정서 조절, 타인과의 협력 같은 발달 과제를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 지는 애초에설계자들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다. 정답률과 진도는 정교하게 계산하면서도, 아이가 누군가와 마음을나누는 능력은 측정 대상으로도 삼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연구 안에는 흥미로운 발견도 하나 섞여 있었다. AI를 쓴 아이들이 같은 목표에 더 짧은 시간 안에 도달했을 뿐, 최종으로 더 많이 배운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겉보기에 학습이 앞당겨진 것처럼 보이는 성과가, 사실은 속도의 문제였을 뿐 이해의 깊이와는 무관했다는 뜻이다.
AI는 정답과 오답이 갈리는 순간에는 누구보다 정확하고 지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가 말을 흐리고, 잠시멈추고, 흥미를 잃어가는 애매한 순간, 정답으로도 오답으로도 딱 떨어지지 않는 그 회색지대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다. 그 회색지대를 읽어내는 것은 계산이 아니라 관계에서 나오는 감각이기 때문이다.정답률은 숫자로 환산되기에 AI가 최적화하기 쉽지만, 아이가 지쳐가는 표정이나 흥미를 잃어가는 미묘한기색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계산할 수 없는 것은 최적화의 대상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난다.
그래서 AI 조기교육이 빨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더 나은 학습법이어서가 아니다. 계산하기 쉬운 부분만골라 정교하게 계산하고 있을 뿐이다. 그 정교함이 부모에게는 눈에 보이는 성과로, 아이에게는 매끄러운경험으로 다가오지만, 정작 아이의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즉 감정을 읽히고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조율하는 능력은 애초에 그 계산 안에 들어 있지 않았다. 빠름의 이면에는 언제나 누락이 있다. 다만 그누락이 숫자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던져야 할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AI 조기교육 앱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이제 의미없는 질문이다. 진짜 물어야 할 것은, 지금 이 화면이 채우고 있는 시간이 아이가 사람과 눈을 맞추고 서투른 말을 주고받으며 스스로 고쳐나가는 시간을 대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화면이 정답을 알려주기 전에 아이가 먼저 손가락으로 짚어보게 기다려주는 일, 아이가 흥미를 잃어갈 때 그 표정을 알아채고 말을 걸어주는 일. 이런 사소한 개입이야말로 AI가 구조적으로 채울 수 없는 그 회색지대를 메우는 유일한 길이다.
기술은 앞으로도 계속 정교해질 것이다. 언젠가는 아이의 표정을 읽고, 침묵의 의미를 구분하고, 지친 기색까지 알아채는 AI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결코 넘지 못할 문턱이 하나있다. 아이가 배우고 싶어 하는 진짜 이유는 정답을 맞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을 지켜봐 주는사람의 눈빛을 다시 마주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다. 그 눈빛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지금도 앞으로도 없다
최홍규 미디어학 박사 / EBS 연구위원
박희준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acklond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