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발레 '안네 프랑크'는 객석을 훑는 게슈타포들의 손전등 수색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무대에 오르면서 군복과 움직임이 공포감을 불러오는 집단무를 펼친다. 독일어로 흐르는 음성들이 공포감을 조성한다. 도망자 신세가 된 안네의 가족은 독일 중부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비밀창고로 피신한다. 식자재 공장 사무실 창고를 책장으로 위장한 생활 공간은 비좁고 불편하지만, 안네는 솔로로 동화적 명랑함을 연기한다. 스크린에 일기가 투사된다.
안네 프랑크(1929~1944)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생이며 1944년 8월 밀고 당하여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이듬해 3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다섯 달을 앞두고 영양실조에 의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안네는 열세 살 때 생일 선물인 빨간 표지의 일기장에 키티라고 별명을 붙이고 2년 동안 관찰하고 느낀 것들은 적어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기 형식으로 남긴 소중한 기록인 ‘안네의 일기’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발레는 이분법적인 구성으로 대중성을 확보한다. 군복과 평상복에 걸친 의상에 의한 구분, 획일성과 자율성의 움직임에 의한 구분, 총과 책에 의한 구분, 가스와 공기에 의한 구분, 군대 배지와 노란 별 표시에 의한 구분, 군가와 대중가요에 의한 구분 등으로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샤막과 회전 무대는 속도와 움직임을 가속하고 긴박감을 창출한다. 불안한 사이렌이 체포에 이르고, 절망의 춤으로 이어진다. 남겨진 일기장이 발견되고, 프레임은 과거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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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안네의 일기’는 평범한 기록을 넘어, 감정 표현과 서사 구조, 언어적 감수성이 매우 뛰어난 자전적 문학의 고전이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유럽을 광기로 몰아넣던 때, 지하실 방에 숨어지내던 네덜란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는 자유를 박탈당한 채,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일상을 유일한 친구인 키티와 대화하면서 보냈다. 사춘기 소녀의 풋풋한 감성은 어머니에 대한 불만, 언니와의 말다툼, 첫사랑 소년에 대한 그리움도 자신과의 대화로 그려낸다.
‘안네의 일기’는 연극 'The Diary of Anne Frank'(1955, 퓰리처상, 토니상 수상), 영화 'The Diary of Anne Frank'(1959, 오스카상 수상)를 비롯해, 실험극, 무용극, 오페라, 설치미술 등에서 다양하게 등장한다. 순수 시선으로 이 세상의 온갖 비극을 바라보는 안네의 태도는 안네의 삶에 대한 꿈과 죽음의 선 너머의 희망을 보게 한다. 이 작품은 극단적인 절망 가운데 기록된 한 소녀의 일기 속의 꺼지지 않은 빛을 발레 무대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수많은 작곡가가 그녀의 일기나 삶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고, 안무가 지우영은 창작 발레 '안네 프랑크'로 안네 프랑크를 ‘인간의 선함에 대한 믿음’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린다. 제임스 윗본은 합창과 오케스트라로 구성된 ‘Annelies’(오라토리오)를 만들었고, 레오나르드 번스타인과 필립 글라스 등도 홀로코스트 관련 음악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인용하거나 헌정했다. 현대 음악에서도 안네 프랑크는 순수함과 희생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한다.
'안네 프랑크'는 ‘기억 예술’의 중심 아이콘 가운데 하나이다. 발레 안무가 지우영은 안네 프랑크를 통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예술”이라는 윤리적 한계와 가능성을 탐구한다. 유대인의 비참한 생활상을 실감 나게 그려낸 안무가 지우영은 의상, 영상, 음성, 사진 등의 과거에 대한 스키마를 이용하여 현재 춤의 활력의 자양분으로 삼는다. 가스실 장면 재현은 이제껏 무대에서 보지 못한 과감한 시도였다. 발레 '안네 프랑크'는 가을날의 알찬 수확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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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하노버국립대학 출신인 안무가 지우영은 '어머니'를 시작으로 창작발레, 연극, 뮤지컬에 걸쳐 40여 편을 대본, 안무, 연출해 왔다. 그녀의 대표작은 '레미제라블', '한여름 밤의 호두까기인형', '나이팅게일과 장미', '소월의 꿈', '사운드 오브 뮤직', '기적의 새', '해븐스 지저스', '이상한 챔버오케스트라', '지젤이 지그프리드를 만났을 때', '신소공녀', '마태수난곡', '줄리엣과 줄리엣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지막 나무', '104 마을의 1004 이야기', '모차르트 바스티앙', '표', '헬렌 켈러', '리브스동문학교', '돈키호테의 사라진 기억들', '개구리 연못' 등이 있다.
'안네 프랑크'는 키티(스테파니 킴, 댄스시어터샤하르 수석무용수), 독일장교(정민찬, 미스터트롯2의 발레트롯), 오토 프랑크(강준하, 안네의 아버지, 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뒤셀(신은석, 안네의 남자친구, 서울발레시어터 부단장이자 성신여대 겸임교수), 페터(김태연, 안네의 남자친구), 게슈타포(김상영, 김동희, 김명준), 안네 프랑크(댄스시어터샤하르의 정지원(금), 계원예고의 김하은(토) 교체 출연)이 개성을 드러내었다. 특히 김하은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지우영 안무가는 한국발레협회 신인안무가상, 춤비평가협회 특별상, 서울예술상 심사위원 특별상(레미제라블), 서울문화투데이 무용부문 최우수상, 한국발레협회 ‘발레빛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지우영은 비영리법인 사)DTS행복들고나 이사장, 예하예술학교 교장, 노원 경계선지능 평생교육지원센터 센터장을 맡아서 아동·청소년을 위한 사회문화복지에도 커다란 힘을 발휘하고 있다. 가을 한가운데에서 안네 프랑크에게 가을옷을 입히자는 지우영의 생각은 성공했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사진 제공=댄스시어터샤하르(촬영 정나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