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험이 끝난 첫 시간이다. 아이들 표정이 갖가지다. 눈가의 웃음에 비해 입을 벌리지 못하고 웃음을 참고 있는 아이, 절망의 그림자가 얼굴을 덮어 버린 아이, 웃을지 말지 고민하는 아이 등 서로 다른 표정에서 아이들의 성적표를 읽을 수 있다. 담당 과목 문제를 확인하고 남는 시간에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이 학교생활이나 개인적인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해 볼 수 있는 기회다.
“창의성과 개별성을 보장해 주지 않으니 문제지요. 과목에 대한 선택권과 다양한 과목의 개설이 필요합니다.”
고등학생 입에서 나온 말로는 너무나 전문적이라 놀랐다.
“그건 교육과정에 대한 건데, 우리 학교(과학고) 정도면 그나마 학생의 흥미와 적성이 고려된 것 아닌가요?”
“크게 보면 그렇죠. 하지만 제가 물리를 전공으로 선택하고 물리 심화를 공부하고자 하면 굳이 화학심화나 생물심화까지 해야 할까요? 그 시간에 다른 과목이 있다면 선택해서 들으면 제 적성에도 맞고 창의성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제법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안하는 아이에게 해 줄 말이 무엇인가?
“그럴 날이 오겠지요. 과학고 교육과정도 더 자유로워져야겠지요. 학생이 원하는 과목이면 어떤 과목이든 가능해야하고 철저히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으로 다시 짜는 게 맞는 겁니다.”
“에이, 선생님, 그런 꿈같은 교육과정이 운영되는 학교가 우리나라에서 가능하겠어요?”
“음…….”
하는 사이 수업 마치는 종이 울리고 말았다. 결국 교육과정이 교육 주체의 만족도를 좌우한다는 의미다.
요즘 고등학교 문과와 이과 통합 교육과정이 큰 이슈가 되고 있다. 문, 이과가 따로 가는 분과주의는 세계에서 일본과 우리나라만 채택하고 있는 교육과정이다. 벽이 많은 한국사회에서 고등학교 문, 이과 교육과정은 한 개인의 일생을 평행선으로 나누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창의지성 교육과정 운영을 과제로 하는 혁신학교가 확산되고 있다. 창의지성은 사물 간, 교과 간에 새로운 연관관계를 맺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낡은 시스템은 그런 교육 목적에 걸림돌이 되어 문제다. 학교가 창의성을 길러주기 보다는 오리려 죽이고 있다는 어느 학생의 말은 백 번 옳다. 특히 현재의 분과주의 교육과정은 학교 운영의 숨통을 막을 뿐이다.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혁신학교 역시 관건은 교육과정에 있다. 특히, 전체 고등학교의 70%를 차지하는 일반계 고등학교의 혁신과 역량강화 등은 교육과정의 자율적, 창의적 편성운영이 성공의 열쇠다. 그렇다고 교육문제가 단순하다는 것은 아니다. 당장에 교사 수급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학생 선택에서 제외된 과목의 해결도 문제다. 또한 문, 이과를 통합하는 교육과정을 운영함에 있어서 실질적인 수업 방식의 질적 변화가 수반 되어야 하고 연쇄적으로 변화되는 수능체제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뭐든 하나의 방식이 최고의 것은 아니다. 적어도 교육과정을 완전히 다시 짤 수 있는 자율성이 확보되는 학교, 학생이 원하는 과목을 개설해 줄 수 있는 학교가 학생에게 더 나은 방식임은 자명하다. 모든 학교에서 동일한 방식을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현재의 분과주의 교육과정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원하는 과목을 배울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방식이 아닌가.
다만, 단순히 물리적 변경이나 숫자 배정의 혁신은 어설픈 변화를 보여 줄 뿐이다. 교육과정 자율화나 문, 이과 통합 교육정책과 관련하여 넘어야 할 산이 대학입시 제도이다. 시험 결과에 따른 서열 세우기와 영역별 석차 매김으로 교육의 수준을 평가하는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한다면 반쪽의 개혁이 될 뿐이다. 예견되는 수많은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문, 이과를 통합하는 것은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는 70%의 아이들이 당당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나아가 그런 자녀를 떳떳하게 바라보는 학부모가 일반화 되지 않고서는 공교육 정상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