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개방으로 중국 경제를 일으킨 덩샤오핑의 유명한 말이다.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2일까지 우한·선전·주하이·상하이 등 중국의 남부지방 일대를 방문하면서 많은 어록을 남겼다. 중국에서는 이를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라고 부른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정책을 처음 발표한 해는 1978년이다. 그 10주년이던 1989년 톈안먼 사건이 벌어졌다. 1991년에는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했다. 이로 인해 중국 내부에는 개혁개방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심화됐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며 철회를 요구하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 공산당의 과격 보수주의적인 그룹들은 "성자성사(姓資姓社)", 즉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당시 덩샤오핑의 정책은 베이징 중앙무대에서는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남부지방 순례 방문은 이 같은 혼란 속에 이루어졌다. 덩샤오핑으로서는 공산당 내부의 혼란에 분명한 메시지를 낼 필요가 있었다.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덩샤오핑의 발언을 주목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1989년 이른바 톈안먼 사건 이후 공식 석상에 일절 나서지 않고 있었다. 1992년의 남순강화는 톈안먼 사건 이후 덩샤오핑이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행사였다. 그런 만큼 전 세계의 관심이 높았다.
덩샤오핑은 남순강화에서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고 밝혔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시장을 토대로 한 개혁개방정책을 계속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톈안먼 사건과 같은 아픔에도 개혁개방 노선을 조금도 후퇴하지 않겠다고 국내외에 천명한 것이었다. 덩샤오핑은 남순강화를 통해 지방의 여론을 규합해 베이징을 움직였다. 1992년 10월 제14차 공산당 대표대회 보고서에 남순강화의 전문이 수록됐다. 이 남순강화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천명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톈안먼 사건으로 일시 중단됐던 개혁개방정책은 다시 추진됐다. 사영 기업 육성, 400여 가지의 규제완화 등 경제 개방에 속도가 붙었다. 중국의 본격적인 개혁개방정책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됐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가 바로 중국 경제 건설의 초석이었다고 평가한다. 오늘날 중국 경제가 미국과 함께 세계의 G2로 올라서게 된 것도 1992년 덩샤오핑이 남순강화에서 시장주의적 개혁개방 노선을 확고히 한 덕이라고 중국 사람들은 믿고 있다. 남순강화는 중국 경제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던 것이다.
덩샤오핑은 바로 이 남순강화에서 희토류 육성을 국가의 전략목표로 내세웠다. 1970년대 중국의 희토류 연간 생산량은 1천 톤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1만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지금은 전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절대다수를 중국이 점유하고 있다. 덩샤오핑이 희토류 개발에 눈뜬 것은 1986년부터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92년 남순강화 길에서 아예 희토류를 국가의 중점 목표로 내세웠다. 중국은 오늘날 전 세계 희토류 광산의 65%, 제련능력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핵심 희토류 광물의 정제·제품화 기술력은 중국에만 있다. 덩샤오핑의 교시가 실천에 옮겨진 셈이다.
이 희토류 광물의 주도권은 원래 미국·호주를 비롯한 서방이 장악하고 있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 캘리포니아 마운틴 패스 광산에서 전 세계 희토류의 60%를 생산해내고 있었다. 희토류의 주도권이 본격적으로 넘어간 것은 2001년이다. 미국은 그해 중국을 WTO체제에 가입시키고 세계의 공장 역할을 맡겼다. 그때는 중국이 미국에 대항해 패권국가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질 것이란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2010년에 공개된 미국지질조사국(USGS)에서 작성한 광물 보고서에 따르면 2005~2008년 미국의 희토류 수입률은 100%에 이르렀다. 그중 중국에서 수입하는 비율이 91%였다. 미국은 언제든 중국에서 싼값에 희토류를 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자국 내 광산 가동을 완전히 중단해 버렸다. 그러다가 이후 중국이 일본과 센카쿠 분쟁 와중에 희토류를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중국이 언젠가는 희토류라는 무기를 미국에도 쓸 수 있다고 보고 뒤늦게 다시 광산을 가동하기 시작했으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중국의 압도적 독점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의 발톱을 미처 보지 못했던 미국의 뼈아픈 실수인 셈이다.
1990년대 빌 클린턴 행정부의 환경보호 기조가 미국 내 희토류 생산 퇴조 움직임으로 이어져 미국에서 많은 희토류 광산들이 폐쇄됐다. 1910년 설립 이래 미국의 광산 활동과 광물 연구를 이끌던 미국 광산청(Bureau of Mines)도 1996년에 문을 닫았다. 2002년 미국은 자원 개발 역사에서 뼈아픈 결정을 내렸다. 유일한 희토류 광산인 캘리포니아의 ‘마운틴 패스’를 폐쇄한 것이다. 중국이 저임금을 무기로 싼값에 희토류를 공급하면서 경쟁이 힘겹던 차에 정련시설에서 방사능 폐수가 유출되는 등 환경문제까지 불거지자 문을 닫은 것이다. 미국이라는 경쟁자가 사라진 후 중국은 무섭게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마운틴 패스는 1919년 뉴멕시코의 한 채굴업자에 의해 발견됐다. 오랜 기간 관심을 끌지 못하던 마운틴 패스는 주력 광물인 유로퓸이 컬러TV에 사용되며 빛을 발한다. 생산량이 한때 세계 2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환경문제로 광산이 폐쇄된 후 중국의 득세가 심해지자 미국의 위기감은 고조됐다. 첨단 제조품의 원재료를 중국에 의존하다가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미국 정부는 2008년 ‘몰리코프’라는 회사가 마운틴 패스를 인수하자 보조금을 주며 부활을 독려했다. 전략은 성공했다. 마침 중국이 일본과의 센카쿠 열도 분쟁을 계기로 희토류 무기화에 나서자 가격이 폭등한 것이다. 몰리코프는 2010년 증시 상장 1년 만에 시가총액 50억 달러를 넘었고 내친김에 분리 시설에 10억 달러를 투자한다. 그러나 1년도 안 돼 가격이 급락하는 바람에 대규모 손실을 입고 2015년 파산한다. 이를 인수한 곳이 국제 헤지펀드 컨소시엄인 MP머티리얼즈다. 지금은 세륨과 란타늄·유로퓸 등을 중심으로 세계 생산량의 9%인 1만5000여 톤을 캐고 있다. 미국은 아직도 스마트폰과 전기차 배터리, F-35 전투기 등에 쓰이는 희토류의 80%가량을 중국에서 공급받고 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한창이다. 초기에는 트럼프가 관세 폭탄을 앞세워 중국을 압박하는 형세였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금지 카드를 꺼내면서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최근에는 트럼프가 시진핑에게 희토류 규제를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희토류를 키우라는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교시가 빛을 발하고 있다. 역사와 미래를 내다보는 지도자의 통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주필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