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는 부채한도라는 제도가 있다. 의회 승인을 받은 합법적인 예산이라고 해도 한도를 넘어 꾸어올 수 없다. 그 한도는 의회가 법으로 정한다. 지금 미국의 법적 부채한도는 36조1000억 달러다. 이 한도는 이미 소진됐다. 만기 도래하는 채무의 상환분을 리볼빙하는 차원에서 국채 발행을 뺀 신규 차입은 한 푼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에 부채한도 증액을 요청해 놓았다. 야당인 민주당이 여러 조건을 내걸고 있어 현재로는 트럼프 대통령의 뜻대로 한도 증액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부채한도 인상 요청이 제때 처리되지 않으면 채무불이행이 발생할 수 있다.
베선트 재무장관이 느닷없이 "디폴트는 없다"고 역설하고 나선 것은 뉴욕증시 등 시장의 이 같은 디폴트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베선트의 이 발언은 시장의 염려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미국이 부채의 덫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무위험 자산으로 여겨졌던 미국 국채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미국 정부부채는 36조2000억 달러다. 우리돈 5경 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이는 우리나라의 한 해 지출 예산 677조 원(2025년)의 73.8배다. 한국 정부가 한 푼도 쓰지 않고 73년을 모아도 미국의 국가부채를 다 갚을 수 없다는 얘기다. 부채에는 이자가 따른다. 2024년 미국 정부가 국가부채 이자로 쓴 돈이 1조2000억 달러다. 이자가 이자를 계속 늘리는 복리 구조를 감안할 때 수백 년이 지나도 빚을 다 갚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계산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 추진 중인 감세 법안이 시행되면 향후 10년간 정부 적자가 최소 2조7000억 달러 더 늘어나는 것으로 돼있다. 부채 폭탄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는 것이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최근 미국 국가신용등급을 한 단계 낮춘 것도 정부부채와 재정적자가 그 원인이다. 뉴욕증시에서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채권시장 균열이 3개월, 6개월 또는 6년 후 나타날지 모르지만 곧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뉴욕증시에서는 이미 부채 폭탄이 터지고 있다. 미국 국채값 폭락과 달러 인덱스 추락이 부채 폭탄의 대표적인 후폭풍이다. 국채가 위험하다는 인식에 금리가 오르고 통화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그동안 신흥시장에서 주로 나타났다. 글로벌 기축통화인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내는 미국은 별걱정이 없었다. 그랬던 미국에서도 최근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채권 디폴트 위험에 대비한 파생상품 신용디폴트스와프(CDS) 스프레드도 미국과 그리스가 비슷한 수준이다.
디폴트란 채무불이행을 뜻한다. 공사채나 은행 융자 등에 대한 원리금 지급을 아예 못 하게 되는 걸 금융 세계에서는 디폴트라고 한다. 세간에서 말하는 부도가 곧 디폴트다. 미국이 근본적인 디폴트에 빠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요즘 미국 경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든든한 상태다. 빚을 꾸어올 길이 막히면 달러를 찍어낼 수도 있다. 미국 달러는 언제 어느 곳에서도 통용된다. 달러 기축통화의 힘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적 디폴트까지 무조건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부채와 재정적자 확대 속에 부채한도가 늘어나지 않으면 미국 연방정부도 채무불이행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뉴욕증시가 우려하는 기술적 디폴트다. 미국 경제가 완전히 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술적 디폴트가 밀어닥치면 미국의 신용도는 급전직하할 수밖에 없다. 미국 국채 투매 현상이 올 수도 있다.
미국은 실제로 1979년 디폴트에 빠진 적이 있다. 부채한도 합의가 뒤늦게 이뤄지면서 기술적 문제로 1억2200만 달러의 채무를 연체해 일시적으로 기술적 디폴트 상황에 빠졌다. 그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2011년에는 부채한도 합의 기한을 단 하루 앞두고 극적으로 타결됐다. 당시 뉴욕증시와 세계 금융시장은 합의 불발 가능성만으로도 패닉 상태에 빠졌다. 2021년에도 디폴트 직전까지 갔다. 코로나19 팬데믹 와중에 돈을 풀면서 국가부채가 급속히 늘어나 디폴트 위기 상황이 야기됐던 것이다. 의회가 막판에 부채한도를 늘리면서 디폴트를 가까스로 막았지만 그 과정에서 진통이 적지 않았다.
미국이 이미 디폴트 상태에 진입해 있다는 평가도 있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법적 한도인 36조1000억 달러를 이미 넘었다. 미국 정부는 이 상황을 연방 연금 출자 중단 등의 한시적 특단 조치로 연명하고 있다. 연방 연금 출자 중단으로 당장 금융 흐름이 막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정부가 지출해야 할 돈을 사전에 계획한 날에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엄정한 잣대로 볼 때 이미 디폴트 상황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설립자인 레이 달리오는 최근 급증하는 미국 국가부채와 재정적자에 대해 다시 경고를 내놨다. 그는 최근 출간한 책 '국가들이 파산하는 방식(How Countries Go Broke)'에서 미국의 부채 상황을 심장병 환자에 빗대어 설명했다. 미국이 경제적 심장마비를 피할 수 있는 시기가 "3년±1년 정도 남았다"는 것이다. 투자은행 라자드의 CEO인 피터 오재그도 최근 경고에 동참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예산국장을 지낸 그는 "정부 재직 시절에는 적자 지출과 부채 수준이 지속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던 이들을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양치기 소년처럼 생각했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늑대가 우리 문턱에 훨씬 가까이 다가왔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경제학자 출신인 케네스 로고프는 "채무 위기는 단순한 산술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면서 "거의 모든 국가의 디폴트는 그것이 노골적인 디폴트이든, 높은 인플레이션을 통한 것이든 간에 부채 계산이 정말로 국가를 몰아세우기 전에 이미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재무부의 보유 현금도 조만간 모두 바닥난다. 현금이 떨어지면 연금이나 군인 급여 등 주요 지출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 국채 이자도 지급하지 못하게 된다. 국가채무 지급 불이행, 이른바 ‘엑스데이트(X-date)’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 용어는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과 싱크탱크 ‘초당적정책센터(BPC)’의 샤이 아카바스 경제정책국장이 국가부채 위기를 경고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은 의회가 부채한도를 상향하거나 유예하지 않을 경우 늦게 잡아도 2025년 8월이면 ‘엑스데이트’가 도래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디폴트라는 퍼펙트 스톰의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