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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세탁기엔 탄소세 없다… EU 규제의 역설

유럽서 만들면 손해, 아시아서 완제품 수입하면 면제… 가전 공장 20년새 17곳 폐쇄
2033년 1480억 달러 시장, 하이얼·미디어만 웃는다
프랑스 가전제품 매장에 진열된 세탁기.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프랑스 가전제품 매장에 진열된 세탁기. 사진=연합뉴스

유럽이 탄소중립을 앞세워 제조업 규제를 강화하는 동안, 정작 유럽 안에서 가전제품을 만드는 공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스페인 IT 전문 매체 샤타카(Xataka)가 28일(현지시각)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지난 20년 사이 스페인에서만 가전 제조 공장 17곳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공장은 전국에 열 곳 남짓이다.

이는 가전 수요 침체가 아닌 제도적 역차별과 생산비 격차가 만들어낸 구조적 탈산업화로, 규제가 오히려 역내 제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규제가 만든 역설… "아시아서 세탁기 만들어 수입하면 탄소세 면제"


스페인 가전제조업협회(APPLIA)에 따르면 현재 스페인 내 가전 제조업체들의 연간 매출 규모는 45억 유로(약 7조 8785억 원)에 그치며 종사자 수도 8000명 수준이다. 면적과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사실상 '바닥'에 가까운 수치다.

이 같은 공동화의 핵심 배경으로 APPLIA 대변인이자 독일 BSH의 스페인 판매 이사인 아우구스토 리오(Augusto Río)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구조적 허점을 지목했다.

그는 "유럽 역내 제조업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의 규제가 현실에서는 오히려 생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CBAM은 철강·알루미늄 등 탄소 집약적 원자재를 역외에서 수입할 때 탄소 부담금을 물리는 제도로, 지난해 본격 시행됐다. 그런데 핵심적인 허점이 있다. 아시아에서 철강을 들여와 세탁기를 만들어 유럽으로 수출하면 CBAM 부과 대상이 아니다.

반면 같은 철강을 유럽 공장에서 사들여 가전을 생산하면 해당 원자재에 탄소 부담금이 붙는다. EU는 이 같은 우회 전략을 막기 위해 세탁기·주방용 오븐·자동차 문 등 완제품에도 CBAM을 확대 적용하는 개정안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원자재엔 탄소세, 완제품엔 면제'라는 역차별 구조가 유럽 내 생산을 밀어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규제 비대칭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스페인은 EU 공통 기준인 2년보다 강화된 3년의 제조 보증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부품 보유 의무기간도 10년으로 정해져 있다. 수입업체는 이 같은 사후 관리 비용을 사실상 피해 가는 반면, 국내 생산업체는 고스란히 부담을 안는다.

수요는 늘어도 '유럽 브랜드' 비중 줄어… 中企 인수까지

아이러니한 것은, 시장 자체가 쪼그라들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시장조사기관 렌브 리서치(Renub Research)에 따르면 유럽 가전 시장은 2024년 1123억 달러(약 173조 원)에서 2033년 1480억 달러(약 228조 원)로 연평균 3%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요는 꾸준히 늘지만, 그 수혜는 유럽 외 기업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시장을 이끄는 상위 5개 브랜드는 독일 BSH, 스웨덴 일렉트로룩스(Electrolux), 영국 다이슨(Dyson), 미국 월풀(Whirlpool), 중국 하이얼(Haier)이다.

유럽계 브랜드가 절반을 차지하지만 생산 거점은 이미 유럽 밖으로 이동한 지 오래다. 스페인 생활가전 기업 테카(Teka) 그룹을 지난해부터 올해에 걸쳐 인수한 것도 중국의 미디어(Midea)였다.

국제로봇연맹(IFR) '월드 로보틱스 2025'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산업용 로봇 신규 설치 대수 54만 2000대 가운데 아시아가 74%를 차지한 반면 유럽은 16%, 절대 대수로는 8만 5000대에 그쳐 전년보다 8% 감소했다. 자동화 투자마저 아시아로 기울고 있다는 방증이다.

버텨온 유럽 업체들의 전략은 '가격 경쟁 포기, 품질 차별화'다. 스페인 카타(Cata) 브랜드 보유사 CNA 그룹의 산티아고 토렌트(Santiago Torrent) 대표는 "성장보다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 과제"라며 품질·혁신·내구성·고급 서비스를 생존 축으로 제시했다.

EU의 '수리권 지침(Right to Repair)'도 애프터서비스 역량을 갖춘 역내 업체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그러나 업계 안팎에서는 이 전략이 현실화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투자가 필요한 데다,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소비자들이 유럽산에 프리미엄을 지불할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유럽 내 제조업 비중(국내총생산 대비)은 2024년 14.3%까지 하락했으며, EU는 2035년까지 이를 20%로 회복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지만, 가전처럼 중국의 가격 경쟁력이 압도적인 분야에서 역내 회귀가 얼마나 현실화될지는 불확실하다.

중국은 이미 유럽의 보호무역 조치에 "필요한 대응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공개 경고한 상태다. 반도체·배터리·희토류에서 유럽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만큼, 브뤼셀이 가전 분야에서 얼마나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을지도 제약 요인으로 꼽힌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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