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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돈의 질서 ⑮ 국경선을 넘어라 "글로벌 머니 노마드" ...기획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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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전 고려대 교수
오랫동안 자본 시장에서 ‘국경’은 넘기 힘든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이었다. 개인이 해외 주식을 사거나 타국의 통화를 차입하여 투자하는 행위는 복잡한 행정 절차와 막대한 비용, 그리고 고도의 정보력을 독점한 월가의 거대 헤지펀드나 글로벌 투자은행(IB)들만의 전유물이었다. 평범한 개인 투자자들은 자국 금융기관이 제공하는 울타리 안에서 국내 주식과 정기예금, 부동산이라는 한정된 선택지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
21세기 신(新) 금융 질서는 공간의 제약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초고속 디지털 네트워크와 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MTS)의 보급, 그리고 고도화된 금융 공학 상품의 대중화는 자본에서 국적이라는 개념을 완벽하게 지워버렸다. 이제 평범한 개인들이 방구석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 터치 몇 번으로 뉴욕 증시의 야간 거래에 참여하고, 도쿄에서 엔화를 빌려 전 세계 고수익 자산에 베팅하는 시대가 열렸다.월가의 거물들만 구사하던 글로벌 매크로(거시경제) 투자를 이제는 시장의 하단부에 위치한 영리한 개인들이 실시간으로 감행하며 국가의 과세 권력과 규제 장벽을 무력화하고 있다. 자본은 오직 더 높은 수익률과 안전성이 보장되는 곳이라면 영토와 이념을 초월해 빛의 속도로 이동한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직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우물 안에만 갇혀 있는 포트폴리오는 글로벌 자본 시장에서 철저한 고립과 자산 가치의 동반 하락을 자초할 뿐이다. 본 칼럼에서는 국경선을 허물며 부를 서핑하는 초국적 개인 자본의 실체를 파헤치고, 이들이 던지는 냉혹한 생존의 메시지를 진단하고자 한다.

국경을 넘어선 개인 자본의 힘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가장 대표적인 전형은 일본의 ‘와타나베 부인(Mrs. Watanabe)’이다. 이는 일본에서 낮은 금리의 엔화를 빌려 해외의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개인 외환투자자들을 통칭하는 금융 전문 용어다. 일본의 흔한 성(姓)인 ‘와타나베’에서 유래한 이 명칭은, 자본의 이동이 더 이상 거대 기관만의 영역이 아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표다.이들이 구사하는 핵심 전략인 ‘엔캐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의 메커니즘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일본 은행(BOJ)이 수십 년간 지속해 온 초저금리 혹은 마이너스 금리 기조를 활용하여, 사실상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엔화 자금을 차입한다. 그리고 이 엔화를 달러나 유로, 혹은 고금리를 제공하는 신흥국의 통화로 환전하여 해당 국가의 국채나 우량 주식, 고수익 부동산에 베팅하는 방식이다. 금리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자 수익(금리 스프레드)과 엔화 가치 하락에 따른 환차익을 동시에 노리는 고도의 매크로 투자다.

최근 글로벌 금융 시장의 변동성 속에서 와타나베 부인과 엔캐리 트레이드의 귀환은 더욱 공격적인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일본이 간헐적으로 금리 인상을 단행하거나 시장의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엔캐리 자금의 청산(청산 쇼크)으로 글로벌 증시가 요동치지만, 영리해진 개인들은 오히려 엔화의 단기적 등락을 활용해 레버리지를 극대화하는 금융 공학적 변칙 기술까지 선보이고 있다.이 현상이 던지는 거시경제학적 시사점은 명확하다. 한 국가의 중앙은행이 자국 경기 부양을 위해 설정한 통화 정책(초저금리)이, 국경이라는 장벽이 사라진 디지털 금융망을 타고 타국의 자산 버블을 심화시키거나 글로벌 유동성을 교란하는 연료로 전용된다는 사실이다. 와타나베 부인은 국가가 설정한 통화의 경계를 개인의 수익 극대화 도구로 해체해 버린 ‘新 돈의 질서’의 선구자들이다.
와타나베 부인의 교훈을 가장 빠르게 흡수하고 진화시킨 이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서학개미(미국 주식 투자 개인)’와 ‘중학개미(중국·중화권 주식 투자 개인)’를 필두로 한 글로벌 유동성 유목민들이다. 이들은 더 이상 대한민국 국내 증시(코스피·코스닥)의 박스권 갇힌 흐름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본의 절대적인 쏠림이 일어나는 글로벌 머니 블랙홀의 중심으로 직접 걸어 들어간 것이다.서학개미들의 행보는 자본의 독점적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유동성 폭발의 시대에 인공지능(AI)과 첨단 반도체 패권을 쥐고 전 세계 돈을 쓸어 담는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테슬라 등 글로벌 초일류 빅테크 기업의 지분을 직접 매수하여 소유권을 주장한다. 이들은 밤낮이 바뀐 시차의 장벽마저 모바일 테크놀로지로 극복하며,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발언과 미국의 고용 지표를 뉴욕의 펀드매니저들과 동시에 분석하고 실시간으로 베팅을 감행한다.

중국 시장의 정책적 변화와 원자재 공급망의 길목을 노리는 중학개미들 역시 지정학적 역학 관계를 투자 전략으로 승화시킨 초국적 자본가들이다. 이들은 자국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내 주식을 맹목적으로 매수하던 ‘애국 마케팅’의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기업의 거버넌스가 취약하고, 주주 환원에 인색하며, 성장 동력이 정체된 시장에는 단 한 푼의 자금도 머무르게 하지 않겠다는 냉혹한 수익률 지상주의의 발현이다. 돈 버는 곳이라면 지옥의 문턱까지라도 가겠다는 이 영리한 개미들은 이미 국적을 초월한 ‘글로벌 머니 노마드(Money Nomad)’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국내 자산에만 집중된 포트폴리오가 치명적인 이유는 세 가지 구조적 한계에 기인한다 . 첫째 한계는 성장성 저하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고착화이다. 대한민국 경제는 저출산·고령화라는 인구통계학적 재앙과 잠재성장률의 구조적 하락 직면에 있다. 기업들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틈바구니에서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했고,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소외된 주주 환원 정책은 국내 증시의 상방을 꽁꽁 묶어두고 있다. 자본이 성장하지 않는 시장에 머무는 것 자체가 기회비용의 심각한 박탈이다. 둘째 문제는 환율 변동에 따른 자산 가치의 실질적 침식이다. 유동성 폭발의 시대에 미국이 OBBBA 법 등을 통해 부채 한도를 무제한으로 늘리며 달러를 찍어내도, 글로벌 경제 위기나 지정학적 리스크가 터지면 자본은 결국 기축통화인 달러라는 최종 안전자산으로 도망친다. 이때 원화 가치는 가파르게 폭락한다. 내가 국내 자산을 쥐고 아무리 원화 기준으로 자산을 지켜냈다 한들, 달러 환율이 급등하는 순간 나의 글로벌 구매력은 순식간에 삭감당한다. 원화 자산 올인은 환율이라는 부메랑 앞에서 무방비로 노출되는 무모한 전략이다.

셋째 한계는 글로벌 쏠림 현상(양극화)에서의 소외이다. 새로 발행된 무제한의 돈은 글로벌 첨단 기술 패권을 쥔 핵심 기지(실리콘밸리와 월가)로 가장 먼저, 가장 대량으로 유입된다. 대한민국 시장은 이 파이프라인의 가장 먼 하류에 위치해 있어, 상류에서 자본 파티가 벌어질 때 겨우 떨어지는 부스러기 유동성에 만족해야 한다. 핵심을 비껴간 변방에서의 투자는 자산의 정체를 넘어 대전환기의 낙오를 의미할 뿐이다.돈의 질서가 재편된 시대에 국경선을 고집하는 것은 스스로 금융적 격리를 자초하는 미련한 행위다. 와타나베 부인이 보여준 통찰과 서학·중학개미가 개척한 길은 우리에게 명확한 생존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자본의 세계에서 영토란 주권의 경계선일 뿐, 내 부를 가두는 장벽이 될 수 없다.
유동성이 대폭발하고 자본의 양극화가 극에 달한 지금, 가장 위대하고 시급한 재테크 전략은 나의 금융 영토를 전 세계로 확장하는 것이다. 자국의 경제적 국경선 안에 내 자산을 가두어 두고 국가가 내 부를 지켜줄 것이라는 안일한 믿음은 통화 가치 하락의 폭포수 앞에서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이제 스스로가 하나의 독립된 '글로벌 매크로 헤지펀드'가 되어야 한다. 미국의 초격차 빅테크 독점 주식으로 생산성의 최상류에 내 돈의 닻을 내리고, 글로벌 원자재와 금, 그리고 안전자산과 대안 자산을 국경 없이 교차 배치하는 입체적인 자산 설계만이 유동성의 범람 속에서 패가망신을 피하고 부를 증식하는 유일한 열쇠다. 국경선은 무너졌고, 무대는 지구 전체로 확대되었다. 과거의 관성과 애국심이라는 감상적 장벽을 과감히 부수고 글로벌 자본의 거대한 파도 위에 올라타는 결단력만이, 새로운 돈의 질서가 지배하는 비정한 전장에서 자산을 위대하게 보존하는 유일한 신의 한 수가 될 것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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