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연준 의장 유력 후보의 '90년대 복제론', 6배 폭증한 재정 적자가 제약
미 국채 이자만 1조 달러 돌파… 통화 긴축 시 재정 지속 가능성 훼손 부메랑
미 국채 이자만 1조 달러 돌파… 통화 긴축 시 재정 지속 가능성 훼손 부메랑
이미지 확대보기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케빈 워시는 인공지능(AI) 기술 혁명을 무기로 1990년대식 '물가가 오르지 않은 호황'을 재현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배런스(Barron's) 보도에 따르면 워시 의장은 최근 발언을 통해 고(故)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의 생산성 주도 성장론을 벤치마킹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백오피스 자동화와 소프트웨어 혁신을 통한 단위 노동비용 하락, 그리고 AI 부문 투자가 촉발할 총요소생산성(TFP) 반등이 인플레이션 없는 고성장을 견인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다만 기술 도입 초기 단계에서 생산성 향상 지표가 통계에 반영되기까지 시차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 미국 정부의 재정 구조가 199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비대해졌다는 치명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이에 미국 금리 인하 시점만 기다리던 국내 기술주 투자자들은 연준의 독립성과 정책 조절 능력이 과거보다 위축될 수 있다는 리스크를 염두에 두고 투자 전략을 짜야 한다.
냉전 종식과 재정 흑자의 90년대… 지금은 6%대 적자 구조화
워시 의장이 복제하려는 1990년대는 통화정책 여건이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 재정 수지는 가파른 적자에서 세기말 흑자로 돌아섰다. 냉전 종식에 따른 군사비 감축(평화의 배당금) 덕에 정부 지출 비중은 국내총생산(GDP)의 18%까지 떨어졌다. 여기에 중국을 필두로 한 신흥국의 개방으로 저렴한 상품과 노동력이 대거 유입되는 공급 충격이 발생했다.
그린스펀은 정부가 빚을 덜 내자 남은 자본이 인터넷과 통신 투자로 흘러 들어가게 유도했다. 돈을 풀어도 물가가 오르지 않았던 배경이다.
반면 현재 미국 재정 적자는 GDP의 5.8%인 1조 9000억 달러(약 2818조 원)에 이른다. 전쟁이나 극심한 경기 침체 때나 보던 규모다. 트럼프 행정부 재집권 이후 이란과의 갈등 등에 따른 군사비 증액이 추진되면서 오는 2027회계연도 국방 예산은 1조 5000억 달러(약 2303조 원)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의회예산처(CBO)는 오는 2036년 미국 재정 적자가 GDP의 6.7%인 3조 1000억 달러(약 4760조 원)까지 치솟는다고 예측했다. 90년대의 대중국 공장 다변화와 달리, 지금은 관세 장벽과 자국 내 생산(온쇼어링) 압박으로 제품 가격이 구조적으로 상승하는 국면이다.
국방비 맞먹는 이자 폭탄… 연준 독립성 뒤흔드는 정치적 압력
가장 큰 걸림돌은 미국 전체 경제 규모와 맞먹는 누적 공공 부채다. 부채 급증으로 인해 미국 정부가 해마다 지출하는 국채 이자 비용만 이미 1조 달러(약 1535조 원)를 넘어섰다. 이는 미국의 핵심 세출 항목인 국방 예산에 육박하는 규모로, 정부의 재정적 자율성을 극도로 위축시키는 요인이다.
이 구조에서는 연준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릴수록 정부의 이자 비용이 폭증해 재정 건전성을 압박하고, 이는 결국 행정부의 금리 인하 압박으로 이어져 연준의 독립성을 뒤흔드는 모순을 낳는다.
재정 지속 가능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한 행정부와 정치권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연준의 독립성이 약화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셈이다.
코말 스리쿠마 글로벌 전략법인 대표는 "연준이 5년 동안 달성하지 못한 2% 물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금리를 계속 올리기는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워시 전 이사에게 통화정책 독립성을 완전히 보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힘을 얻는 이유다.
과거 증시가 폭락할 때마다 금리를 내려 구출해주던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도 기대하기 어렵다.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지불유예)과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LTCM) 파산 당시 그린스펀은 물가 안정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금리를 인하해 시장을 구했다. 그러나 스리쿠마 대표는 "이미 물가가 높은 상황에서 정부 적자까지 비대해 시장이 '워시 풋'의 실효성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존 실비아 다이내믹 이코노믹 스트레티지 대표 역시 역사적으로 중앙은행들은 결국 정부 적자를 메우기 위해 돈을 찍어냈고 그 결과는 늘 인플레이션이었다고 꼬집었다.
미국 10년물 금리 4.5% 고착화 시… 조건부 시나리오별 대응 필요
단기적으로 연준은 AI가 가져올 생산성 향상에 기대를 걸며 금리 인하에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인플레이션을 즉각 용인하기보다 겉으로는 긴축 기조를 유지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하반기 금리 인하 폭이 시장 예상보다 줄어들며 기술주 중심의 미국 증시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고금리 환경이 고착화하는 '하이어 포 롱거(Higher for longer)' 시나리오에 무게가 실린다. 정부 부채가 촉발하는 구조적 인플레이션 압력 때문에 연준이 기준금리를 과거의 저금리 수준(0~2%)으로 되돌리기는 어렵다.
만약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4.5% 위에서 고착화된다면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자금 이탈 압박이 지속될 수 있다. 미래 수익을 현재 가치로 환산할 때 적용하는 할인율 부담이 커져 성장주의 밸류에이션이 강한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다만 시장의 충격은 업종별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달러 강세 장기화가 한국 IT 수출 기업들의 환차익 효과로 이어질 수 있는 데다, 고금리 압박 속에서도 뚜렷한 AI 실적 가시성을 증명하는 일부 빅테크와 밸류체인 기업들은 차별적인 방어력을 보여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리스크 관리는 불가피하다. 한국 기술주 투자자들은 자산 배분 시 성장주 일변도의 포트폴리오에서 벗어나, 현금 흐름이 유효하고 부채 비율이 낮은 가치주 비중을 조절하는 혜안이 필요하다. 이제 시장을 움직이는 핵심 변수는 단순히 연준의 통화 긴축 여부가 아니다. 금리보다 중요한 것은 '재정이 허용하는 금리의 상한'이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