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해 학교 간다"던 30년 'TSMC맨', 4일 뒤 인텔 부사장 명함
권한 없는 전략실 이동 후에도 부하 접촉…A16·A14 '설계도' 노렸다
권한 없는 전략실 이동 후에도 부하 접촉…A16·A14 '설계도' 노렸다
이미지 확대보기대만 TSMC가 자사의 30년 베테랑이자 핵심 임원이었던 로 웨이젠(Wei-Jen Lo) 전 수석부사장을 상대로 법적 대응의 칼을 빼 들었다. 퇴직 직후 경쟁사인 미국 인텔(Intel)의 고위 임원으로 이직한 그가 TSMC의 차세대 초미세 공정의 미래인 'A16(1.6나노급)'과 'A14(1.4나노급)' 관련 기밀을 유출했다는 혐의다. 이번 소송은 단순한 인력 유출 차원을 넘어,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패권 경쟁의 최전선인 대만과 미국의 '기술 보안 전쟁'이 법정 공방으로 비화했음을 의미한다.
TSMC는 25일(현지 시각) 공식 성명을 통해 로 전 수석부사장을 대만 지적재산상업법원에 제소했다고 밝혔다. 혐의는 고용 계약 위반, 경업 금지 약정 위반, 그리고 영업비밀 보호법 위반 등이다. 로 전 수석부사장은 2004년 부사장으로 입사해 2014년 수석부사장(Senior VP)에 올랐으며, 2025년 7월 27일 공식 은퇴했다. 사측이 제기한 소송의 핵심은 로 전 수석부사장의 이직 시점과 과정에서의 '기망 행위'와 '기밀 탐지'다.
"학교 간다" 거짓말…4일 만의 변심
소장에 드러난 로 전 수석부사장의 퇴사 과정은 한 편의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할 만큼 치밀했다. TSMC 실비아 팡(Sylvia Fang) 법무실장(General Counsel)은 그의 퇴직 닷새 전인 2025년 7월 22일 출구 면담(Exit Interview)을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사측은 경업 금지 의무를 재차 고지하고 관련 서약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당시 로 전 수석부사장은 향후 거취를 묻는 사측에 "학계(academic institution)로 갈 계획"이라고 진술했다. 인텔행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재직 중 기밀 유지 협약(NDA)과 경업 금지 약정에 모두 서명한 상태였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겠다"던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는 퇴사 직후인 10월 말, TSMC의 최대 경쟁자인 인텔의 수석부사장(EVP) 명함을 팠다. TSMC 측은 소장에서 "직접적인 경쟁사로의 즉각적인 이직은 그가 TSMC의 영업비밀과 기밀 정보를 경쟁사에 공개하거나 전송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며 "피해 보상과 법적 구제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전략실 좌천 뒤에도 '설계도' 탐닉
TSMC가 이번 사건을 단순 이직이 아닌 '계획된 기술 탈취'로 보는 결정적 근거는 그의 퇴직 전 행적에 있다. 로 전 수석부사장은 2024년 3월, 핵심 연구개발(R&D) 조직에서 기업전략개발(Corporate Strategy Development) 부서로 발령받았다. 이는 회장과 CEO를 보좌하는 참모 조직으로, 기술 개발을 직접 관할하거나 세부 R&D 데이터에 접근할 권한이 없는 일종의 한직(閑職)이었다.
그러나 TSMC 조사 결과, 그는 부서 이동 후에도 집요하게 첨단 기술 정보에 접근을 시도했다. 자신의 지휘 계통에 속하지 않는 수석부사장급 미만의 R&D 실무자들과 사적인 만남을 갖고, 개발 중이거나 향후 로드맵에 포함된 차세대 노드 기술에 대한 상세 정보를 요구한 정황이 포착됐다.
현지 언론과 업계에 따르면 그가 수집하려던 정보는 TSMC의 미래 먹거리인 A16 및 A14 공정 데이터인 것으로 파악된다. 로 전 수석부사장은 과거 TSMC의 2나노(nm) 공정 수율 안정화에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TSMC 측은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을 종합해 볼 때, 이는 계약 및 법적 의무에 대한 심각한 위반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핵심 지적재산권에 치명적 위험을 초래하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대만 정부 "국가 반역 준하는 범죄"
사태는 기업 간 소송을 넘어 대만 정부 차원의 안보 이슈로 확산했다. 대만 경제부(MOEA)는 TSMC의 제소 사실이 알려지자 즉각 "기업의 이익 보호를 위한 법적 조치를 존중하며, 산업계에 미칠 파장을 예의주시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대만 검찰과 조사 당국은 즉각적인 내사에 착수했다. 밍신 쿵(Ming-Hsin Kung) 경제부 장관은 검찰이 현재 관련 정보를 수집 중이라고 확인했다. 당국은 이번 사건이 '국가 핵심 기술' 유출이나 '국가안전법' 위반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대만에서 반도체 기술 유출은 단순 산업 스파이 혐의를 넘어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중대 범죄로 취급된다. 이와 별도로 경제부는 대만 산업기술연구원(ITRI)에 로 전 수석부사장의 원사(academician) 자격 박탈 가능성 검토를 지시한 상태다. 아직 명확한 박탈 규정은 없으나, 정부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조치로 해석된다.
인텔 CEO "루머일 뿐"…기술 전쟁의 서막
인텔 측은 기술 절취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며 진화에 나섰다. 립부 탄(Lip-Bu Tan) 인텔 CEO는 반도체산업협회 시상식에서 블룸버그와 만나 "관련 보도는 소문과 억측(rumor and speculation)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인텔은 지적재산권을 존중한다"며 로 전 수석부사장이 TSMC의 기밀 정보를 반입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하지만 인텔의 내부 채용 검증 절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로 전 수석부사장은 지난 10월 말 인텔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까지 어떠한 공식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TSMC가 자사 기술 보호를 위해 전직 고위 임원에게 칼을 겨눈 이번 사건은, 반도체 인재 확보 전쟁이 법적·윤리적 한계선 위에서 얼마나 위태롭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이 경쟁사의 핵심 임원을 상대로 건 소송전은 향후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이직 관행과 기술 보안 프로세스에 거대한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