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 승인 무시하고 일방 삭감, 닉슨 탄핵 사례 재현 우려

배런스는 지난 8일(현지시각)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 의회가 90억 달러(약 12조 원) 이상의 예산 삭감안을 통과시키며 대통령의 예산 집행 거부권을 사실상 부활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지워싱턴대학교 정치경영대학원 입법업무 프로그램 책임자인 케이시 버갯은 "민주당이 예산안 협상을 거부하는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이 합의 후에도 예산을 임의로 삭제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의회가 예산안을 통과시켜도 대통령이 집행을 거부하는데 세부 항목을 놓고 협상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닉슨의 남용과 1974년 예산통제법 제정
대통령의 예산 집행 거부는 미국 건국 초기부터 존재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1803년 포함(砲艦) 건조 예산을 지연시켰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해리 트루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예산 집행을 보류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도 인플레이션 급등 시 고속도로 건설 예산을 보류한 사례가 있다. 법원과 의회는 행정부가 기술이나 재정 이유로 선의를 갖고 행동한다고 보는 한 대체로 눈감아줬다.
그러나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예산 집행 거부를 정치 무기로 활용했다. 닉슨은 자신이 반대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수십억 달러의 연방 예산 집행을 거부했다. 한 사례에서는 도시들이 예산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주택 건설 예산을 거부했고, 다른 경우에는 의회의 명확한 집행 의사에도 환경과 공중보건 예산을 보류했다.
전환점은 닉슨이 의회가 거부권을 무효화하고 통과시킨 수질오염 방지 프로그램 예산마저 집행을 거부하면서 찾아왔다. 이에 대응해 의회는 1974년 의회예산 및 집행통제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현대 예산 절차를 확립하고 대통령의 일방 예산 집행 거부 권한을 명시로 박탈했다. 이후 대통령은 의회에 예산 삭감을 요청해야 하며, 의회가 45일 안에 승인하지 않으면 예산을 집행해야 한다.
2억 달러 우크라이나 군사원조 지연과 첫 탄핵
트럼프 대통령의 1기 행정부는 이러한 개혁의 한계를 시험했다. 2019년 트럼프 행정부는 의회가 승인한 우크라이나 군사원조 2억 달러(약 2844억 원) 이상을 지연시켰다. 이 집행 보류는 비공개로 이뤄졌으며 삭감 요청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여야 의원이 함께 구성한 정부책임처(Government Accountability Office)는 이를 집행통제법 위반으로 판정했다. 이 사건은 이후 트럼프의 첫 번째 탄핵 핵심 쟁점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최근 더 나아가고 있다.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지난 수 개 월간 90억 달러(약 12조 원) 이상의 예산 삭감 법안을 통과시켰다. 삭감 대상은 인플레이션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의 청정에너지 예산, 국세청(IRS) 징세 집행 예산, 공영방송 예산, 팬데믹 시대 인프라 지출 등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면 합법이든 반합법이든 예산 집행 거부와 삭감이 밀려올 것이라는 신호다.
예산정책우선센터(Center on Budget and Policy Priorities)는 "정치 전술로 예산 집행을 보류하는 것은 불법이며 전체 예산 절차를 훼손한다"고 지적했다. 월가에서는 명확한 집행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전략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예산권은 의회 소관" 헌법 원칙 흔들려
미국 헌법 1조 9항은 "법률로 세출을 승인한 결과가 아니면 재무부에서 돈을 인출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의회의 예산 권한을 규정한 기본 조항으로, 선택 사항이 아니라 대통령이 왕이 되는 것을 막는 헌법상의 장치다.
버갯 책임자는 "1974년 개혁은 닉슨의 남용 이후 의회 권한을 재확인하려는 여야 합의 노력이었다"며 "현재 의회는 집행통제법의 집행을 강화하고 예산 집행의 투명성을 높이며, 대통령이 자신이 반대하는 세출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재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예산 집행 거부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자신의 핵심 의제로 만들었다"며 "의회가 더 명확한 선을 긋지 않으면 양당의 앞으로 대통령들이 그의 선례를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예산 권한은 대통령이 아니라 의회를 통한 국민에게 속한다. 의회가 이를 방어하지 않는다면 대통령들이 계속해서 이 권한을 빼앗아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