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기술 규제를 뚫고 급성장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각) 닛케이 보도에 따르면, 중국이 업계 선두 주자인 대만 TSMC와의 기술 격차를 불과 3년으로 좁혔다. 이는 미국의 규제가 중국의 첨단 칩 개발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기술 도약은 화웨이의 최신 스마트폰 메이트60 프로에서 확인된다. 탑재된 기린 9000s 칩은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 SMIC의 7나노 공정으로 제작됐다. 이는 미국 제재로 TSMC 첨단 공정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뤄낸 성과다.
성능 면에서 기린 9000s는 TSMC의 5나노 공정으로 제작된 스냅드래곤 888과 유사한 수준을 보인다. 싱글 코어에서 약 1300점, 멀티 코어에서 약 5200점을 기록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중국이 극자외선(EUV) 장비 없이 이 과제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칩 설계 측면에서 중국의 발전은 뚜렷하다. 화웨이의 기린 9000s는 ARM v9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하며, 고성능 코어와 저전력 코어를 효율적으로 조합한 빅.리틀(big.LITTLE) 구조를 채택했다. 이는 최신 모바일 SoC 설계 트렌드를 반영한 것으로, 성능과 전력 효율성을 모두 고려한 설계다.
성능 측면에서 기린 9000s는 애플의 A16 바이오닉이나 퀄컴의 스냅드래곤 8 Gen 2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 벤치마크 테스트에서는 일부 항목에서 경쟁사 제품을 앞서는 결과를 보였다.
AI 처리 능력 또한 크게 향상됐다. 기린 9000s에는 자체 개발한 NPU(Neural Processing Unit·신경망처리장치)가 탑재돼 있어, 온디바이스 AI 처리 성능이 이전 세대 대비 약 2배 향상되었다. 구체적으로, AI 벤치마크 테스트 중 하나인 MLPerf에서 이미지 분류 작업 속도가 초당 450프레임에서 950프레임으로 증가했다. 이는 퀄컴의 최신 칩과 비슷한 수준이며, 일부 작업에서는 더 나은 성능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중국 반도체 기술 발전은 단순히 제조 공정 미세화에 그치지 않고, 칩 아키텍처 설계, 전력 관리, AI 가속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는 중국이 종합 반도체 기술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발전은 향후 중국 반도체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첫째,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 중국 내 반도체 공급망이 더욱 강화되어 미국의 제재에 대한 내성이 높아질 것이다. 셋째, AI와 5G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의 경쟁력이 더욱 향상되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에서 중국의 위상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경쟁 구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2023년 중국 기업들은 글로벌 칩 제조 장비 구매의 34.4%를 차지했다. 이는 한국과 대만을 합친 것보다 많은 수치다. 이러한 대규모 투자는 중국의 생산능력을 급격히 확대할 전망이다.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TSMC뿐만 아니라 삼성전자, 인텔, 퀄컴 등 기존 강자들도 위협을 느끼고 있다. 특히 인텔은 파운드리 사업의 분사 가능성과 손실 축소를 위해 일부 기존 확장 계획을 폐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고, 퀄컴도 중국 자체 AP 개발로 인해 시장 점유율 하락 우려에 직면해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에 미칠 영향도 상당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시장에서 중국의 추격을 받고 있다. 창장메모리(CXMT)와 양쯔메모리(YMTC)의 기술력이 빠르게 향상되고 있어 한국 기업들의 시장 점유율이 위협받고 있다.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삼성전자는 TSMC에 이어 2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SMIC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AI 칩과 같은 신성장 분야에서도 중국 약진이 두드러져 한국 기업들의 발 빠른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에 한국 반도체 업계의 대응이 시급해졌다. 첫째, 연구개발(R&D) 투자 확대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둘째, 특화 기술 개발이다.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부가가치 제품에 집중하고 있다. 셋째, 글로벌 협력 강화다. 최근 삼성전자는 ASML·퀄컴 등과 기술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글로벌 산업 지형을 크게 바꾸고 있다. 물론, 미국 대선 이후 새로운 정부에서 중국에 대한 과학기술 규제는 더 촘촘하게 강화될 것이지만, 한국을 비롯한 주요 반도체 강국들은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기술 혁신과 새로운 성장 전략 수립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 기업들은 고부가가치 영역에서 경쟁력 강화와 함께 글로벌 협력 네트워크 확대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대중국 제재가 계속되는 가운데, 한국 반도체 산업의 전략적 포지셔닝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