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삼성전자가 최근 주춤하는 가운데, 업계 2인자 SK하이닉스가 본격적으로 삼성을 제치고 업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규모나 물량은 여전히 삼성전자에 미치지 못하지만, ‘기술’만큼은 삼성에 버금가거나 일부 앞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24일 외신 등 해외 업계에 따르면 인공지능(AI) 열풍으로 엔비디아의 AI 칩 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여기에 탑재된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제품도 덩달아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주가가 234% 이상 오른 엔비디아 못지않게 SK하이닉스 역시 주가가 88%나 오르면서 AI 특수로 인한 수혜를 톡톡히 누렸다.
최근 엔비디아가 선보인 차세대 AI용 GPU(그래픽 처리 장치) ‘블랙웰’에도 하이닉스의 최신 5세대 ‘HBM3E’가 가장 먼저 탑재될 예정이다. 아직 엔비디아 납품을 위한 테스트를 진행 중인 삼성전자를 제치고 HBM 부문 선두 주자로 우뚝 섰다.
SK하이닉스는 HBM을 가장 먼저 양산 및 상용화한 회사다. 지난 2014년 AMD와 함께 세계 최초의 HBM을 공동 개발하고, AMD의 신형 그래픽카드를 통해 첫선을 보였다. 다만 초기 HBM은 비싼 가격에 비해 성능이 고만고만해 AMD 외에 도입한 곳이 거의 없었고, 삼성 등 다른 메모리 제조사들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침 엔비디아가 자사의 고성능 GPU 가속기용 메모리로 HBM을 탑재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HBM 부문에서 SK하이닉스는 50% 대 점유율을 유지하며 시장을 선도해 왔다.
삼성전자 역시 2세대 제품인 HBM2부터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주력인 D램에 집중하느라 눈치를 보는 사이, 엔비디아의 GPU 가속기가 AI 가속기의 대명사로 자리 잡으면서 HBM 수요가 급증했고, 삼성은 그대로 HBM 시장 주도권을 SK하이닉스에 내주게 됐다.
심지어 삼성은 차별화를 위해 자사의 최신 5세대 제품에 ‘HBM3P’라 이름을 붙였다가 엔비디아의 요청으로 SK하이닉스가 먼저 제시한 ‘HBM3E’로 도로 바꾸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SK하이닉스의 약진은 HBM 뿐만이 아니다. JEDEC(국제반도체표준협의기구)가 지난 5일 HBM 다음으로 빠른 고속 메모리 표준 ‘GDDR7’을 발표하면서 SK하이닉스는 삼성과 더불어 GDDR7 공급자 목록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다.
특히 이번에 엔비디아가 차세대 AI 칩을 발표한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 ‘GTC 2024’에서 삼성전자가 최대 37Gbps(초당 37기가비트)의 속도를 내는 GDDR7 제품을 공개하자 SK하이닉스는 그보다 더 빠른 최대 40Gbps(초당 40기가비트) 속도의 GDDR7 제품을 공개하며 기선을 제압했다.
일반 D램 분야에서도 SK하이닉스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현재 D램 시장 가장 최신 제품인 DDR5의 경우, 지난해 말 SK하이닉스가 시장 점유율에서 삼성전자를 처음으로 역전했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기준 서버용 DDR5 시장 점유율에서 SK하이닉스는 49.6%로 1위를 차지했다. 반면, 삼성전자는 35.2%로 2위에 그쳤다. 이는 삼성전자가 낮은 수율(양품 생산 비율)과 그로 인한 불량 및 호환성 이슈가 급증했지만, SK하이닉스는 서버 시장 큰손인 인텔로부터 한발 먼저 호환성 인증을 획득하는 등 선전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0일 제55기 정기주총에서 “오는 2027년까지 (인텔을 제치고) 반도체 세계 1위에 복귀하겠다”라는 각오를 밝혔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를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 경계현 대표는 “메모리 판매 전 제품에서 경쟁력 우위를 확보하는 등 업계를 다시 선도하겠다”라고 직접 언급했다. 이는 현재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전반적으로 SK하이닉스에 밀리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물론 전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여전히 SK하이닉스를 크게 앞서있다. 하지만 SK하이닉스가 HBM을 시작으로 기술력에서 앞서기 시작한 이상, 이를 뒤집는 것도 시간문제다. 만년 2위였던 SK하이닉스가 모처럼 거머쥔 ‘왕좌’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최용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pch@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