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로 유명하다.
미국이 오늘날 세계 최강 경제대국의 지위에 오른 배경에도 이민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이어지는 이민자 덕분에 미국 경제를 떠받치는 고용시장이 탄탄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 경제를 강타한 역대급 구인대란의 근본 배경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시절 대폭 강화된 ‘반이민 정책’이 꼽히는 이유도, 미국 전체 인구에서 둘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히스패닉계가 미국 경제에 기여하는 정도가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5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난 이유도, 전 세계적인 저출산 위기 속에서 지난해 미국 인구가 전년 대비 소폭이나마 증가한 것도 모두 이민자 덕분이다.
이민자 없이 미국 경제가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은 미국 중앙은행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여론은 이 같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우려를 낳고 있다. 미국의 현실과 미국인의 생각이 따로 놀고 있는 셈이다.
◇ 파월 연준 의장 “이민자 부족 등이 구인대란 구조적 배경”
14일(이하 현지 시간)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따르면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지난해 1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용인력 부족 문제는 구조적인 양상을 현재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제활동 인구의 조기 은퇴 문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충격파와 아울러 △이민자 유입이 구인대란을 해소할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들었다.
이 같은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고용인력이 구조적으로 부족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는 얘기다.
JP모건자산운용의 데이브 켈리 선임 글로벌 분석가는 비즈니스 인사이더와의 인터뷰에서 “이민자 유입 규모를 늘리는 것만으로도 미국의 고용인력 부족 문제를 손쉽게 해소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고용시장 현실과 미국인 ‘이민’ 여론 따로 놀아
그러나 미국인들의 생각은 미국의 이 같은 경제적 현실과 괴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미국의 고용시장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글로벌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13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달 미국 성인 1000여 명을 대상으로 미국 이민정책의 현주소에 대해, 즉 현재의 이민자 유입 규모에 대해 만족하는지를 물은 결과 응답자의 63%가 '불만'이라는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불만이라는 입장을 밝힌 응답자 가운데 64%는 이민자를 줄여야 한다는 견해를 밝힌 것으로 나타났고, 늘려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응답자는 8%로 나타났다. 결국 이민자가 많아 불만이라는 의견이 다수를 이뤘다는 뜻이다.
이민자 수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미국인 역시 지난 2021년 조사에서는 19%로 나타났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35%로 확인돼 1년 사이에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갤럽은 설명했다.
반대로 현재의 이민자 유입 규모에 만족한다는 의견을 밝힌 응답자는 28%에 그쳐 지난 2012년 이후 1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적 성향별로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미국인의 불만도가 민주당 지지자의 그것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고, 연령이 높을수록 불만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
공화당 지지자의 경우 무려 71%가 이민자 인구가 지나치게 많으므로 줄여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고, 민주당 지지자의 경우 19%가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공화당 지지자 사이에서 불만도가 71%로 나온 것은 갤럽 조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갤럽은 설명했다.
55세 이상 미국인의 경우 불만이 있다는 응답이 2021년 조사에서는 21%였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55%로 나타나 크게 증가했다.
◇ 멕시코 국경 통한 이민자 급증이 부정적 여론 키워
지난 1년 사이에 이민자에 대한 우호적인 생각이 미국민 사이에서 크게 줄어든 것은 멕시코와 접한 미국 남부 국경을 통한 불법 이민자가 크게 증가한 것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갤럽은 분석했다.
미국 정부에 따르면 200만 명 이상의 이민자가 지난해 남부 국경을 통해 미국에 들어온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전년 대비 4배나 증가한 수준이다.
퓨리서치센터가 미국 정부의 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미국 남부 국경을 통한 이민자 유입 규모는 지난달 기준으로 사상 최고치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문제는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도 부담스러운 현안으로 부상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시행한 ‘타이틀 42’라는 이름의 반이민 정책이 오는 5월 시행 만료될 예정인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달 발표를 통해 '타이틀 42'를 확대하는 내용의 조치를 5월부터 시행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비판 여론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노골적인 반이민 정책을 추구했던 트럼프가 내린 '타이틀 42'는 코로나19 방역 차원에서 미국 국경을 무단으로 넘은 자를 즉시 추방할 수 있게 허용한 조치였는데, 이를 폐지하기는커녕 강화하는 내용의 조치를 앞으로 시행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