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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실질실효환율...신현송 한국은행 총재의 경고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전 고려대 교수이미지 확대보기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전 고려대 교수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의 말 한마디가 외환시장의 판을 흔들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7월 초 이후 가파른 내리막을 탔다. 문제는 방향보다 속도였다.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이, 너무 빨리 떨어진 환율은 시장 곳곳에 적잖은 충격을 남겼다. 가장 먼저 비명을 지른 쪽은 서학개미들이다. 미국 주식으로 번 수익이 환차손에 고스란히 깎여 나가면서 계좌를 들여다보는 표정마다 울상이 됐다. 달러로 수출 대금을 받는 기업들도 환율 하락이 실적에 미칠 영향을 셈하느라 분주하다.
그래서 시장 한편에서는 반전을 점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환율 하락을 이끌어 온 반도체 투톱의 자사주 매입이 마무리된 만큼, 원화를 떠받치던 힘도 빠지고 환율이 다시 위쪽으로 고개를 들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바로 그 순간 신 총재가 입을 열었다. 교역 상대국 통화를 모두 저울에 올린 국제결제은행(BIS) 실효환율로 보면 원화는 89로, 장기 평균 101에 한참 못 미친다는 진단이었다. 원화는 아직 제값을 찾지 못했다는 선언이다. 환율 재상승에 베팅하던 시장에는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이 발언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통화정책을 쥔 중앙은행 수장이 환율을 바라보는 잣대를 공개적으로 꺼내 들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책 신호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눈여겨봐야 할 것은 89라는 숫자 자체보다 총재가 그 숫자를 꺼낸 의도다. 그렇다면 신 총재가 근거로 내세운 실효환율은 무엇이며, 그 말 속에는 어떤 구상이 담겨 있는가.

우리가 매일 접하는 원·달러 환율은 명목 양자환율이다. 1달러를 사는 데 원화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하고만 교역하지 않는다. 중국, 일본, 유로 지역, 아세안과의 거래 비중이 크다. 달러가 세계 통화에 대해 일제히 강해지는 국면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올라도 원화가 엔화나 위안화에 대해서는 오히려 강해질 수 있다. 원·달러 숫자 하나로 원화의 대외 가치를 판단하면 착시가 생기는 이유다.
이를 보정한 지표가 명목실효환율이다. 주요 교역 상대국 통화에 대한 원화 환율을 교역 비중으로 가중평균해 하나의 지수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국의 물가 변동까지 반영한 것이 실질실효환율이다. 환율이 그대로라도 한국 물가가 교역국보다 덜 오르면 한국 상품은 상대적으로 싸진다. 실질 구매력으로 보면 원화 가치가 떨어진 것과 같다. 실질실효환율은 이처럼 통화 가치와 물가를 함께 따져 한 나라 통화의 실질 구매력과 상품의 종합적인 가격경쟁력을 보여준다.

BIS 지수는 기준연도를 100으로 놓고 수치가 오르면 통화 가치 상승, 내리면 하락을 뜻한다. 원·달러 환율과는 방향이 반대다. 지수 89가 평균 101보다 낮다는 것은 원화의 실질 가치가 장기 평균보다 12%가량 낮다는 의미다. 해외여행에서 체감하는 비싼 물가, 수입 원자재와 에너지 가격 부담이 바로 이 숫자 속에 담겨 있다. 원·달러 환율이 내려왔다고는 하지만, 교역국 전체와 물가까지 놓고 보면 원화는 여전히 싸게 팔리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실질실효환율이 곧 적정 환율은 아니다. 어느 기간의 평균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저평가 폭은 달라진다. 개인투자자의 해외주식 투자, 국민연금의 해외자산 확대, 연간 최대 2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약정처럼 자본이 꾸준히 밖으로 나가는 구조가 굳어졌다면 균형 수준 자체가 낮아졌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신 총재가 굳이 실효환율을 꺼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의 환율 구상은 세 갈래로 읽힌다.

첫째는 물가다. 신 총재는 환율이 수입물가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중앙은행에 환율 자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한은은 7·8월 연속 인상 뒤 이번에 금리를 동결하면서도 성장과 물가 오름세가 예상보다 강하다며 긴축 기조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실효환율 기준 원화 약세는 물가 측면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숙제라는 인식이다. 환율이 다시 튀어 오르면 그동안의 긴축 효과가 수입물가 경로로 상쇄될 수 있다는 경계심도 읽힌다.
둘째는 분배다. 신 총재는 환율이 10% 내릴 때 소득 1분위 가계의 구매력이 0.4% 이상 오른다는 분석을 소개하며 환율 하락이 양극화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고환율은 수출 대기업에 환차익을 안기지만, 그 부담은 수입 생필품과 에너지 가격을 통해 서민 가계로 넘어간다. 서학개미의 환차손이 눈에 띄는 고통이라면, 고환율 아래 서민의 장바구니는 더 넓고 조용한 고통이다.

셋째는 시장 구조다. 그는 인사청문회에서 장부 외 파생상품 거래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한은 창립기념식에서는 외환시장 24시간 개장과 역외 원화결제시스템 구축으로 역외선물환(NDF) 수요를 역내로 흡수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BIS 경제고문 시절부터 달러 강세가 세계 금융 여건을 조이는 경로를 연구해 온 학자답게, 그는 환율을 무역수지보다 자본 흐름과 금융 여건의 문제로 본다. 환율에서는 예측 가능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세 갈래를 겹쳐 보면 메시지는 하나로 모인다. 신 총재는 환율을 특정 수준으로 끌어내리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원화가 실질 가치로 보아 아직 저평가돼 있으니 환율 재상승을 기정사실로 여기지 말라는 신호는 분명히 보냈다. 반도체 기업의 자사주 매입이 끝났다는 일회성 수급만 보고 환율 방향을 점치는 것은 위험하다. 중앙은행은 물가와 분배, 시장 구조라는 더 긴 시간표를 놓고 움직이고 있다.

시장도 이 시간표를 전제로 셈법을 다시 짤 필요가 있다. 환율 반등을 기대하며 달러 자산을 늘려 온 투자자라면 환차손 위험부터 다시 따져봐야 한다. 수출 기업 역시 고환율이 안겨준 가격경쟁력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하기 어렵다. 반대로 수입 원자재 부담에 시달려 온 기업과 가계에는 숨통이 트일 여지가 생긴다. 총재의 발언은 시장을 겁주려는 구두 개입이라기보다 앞으로의 정책 방향을 미리 알려주는 안내문에 가깝다.
물론 외환정책의 최종 권한과 책임은 재정경제부에 있고, 금리정책이 환율의 짐까지 떠안으면 경기와 금융안정 사이의 균형이 흐트러질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두 가지가 뒷받침돼야 한다. 하나는 정책의 일관성이다. 한은의 통화정책과 재정경제부의 외환정책이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시장은 총재의 말을 일회성 발언이 아닌 정책 신호로 받아들인다. 다른 하나는 제도 개혁의 속도다. 외환시장 개방과 역외 거래의 역내 흡수가 실제로 자리 잡아야 원화가 외부 충격에 덜 흔들리는 체력을 갖출 수 있다. 이런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중앙은행 수장이 환율을 보는 잣대를 밝혔다는 사실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실질실효환율 89는 원화가 아직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경고장이다. 동시에 한국 경제가 언제까지 일회성 수급과 투기적 기대에 환율을 맡겨 둘 것인가를 묻는 질문지이기도 하다. 총재의 말을 흘려듣고 과거의 관성대로 움직이는 쪽은 또 한 번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게 될지 모른다. 시장이 이 경고를 귀담아들을 때 비로소 환율의 롤러코스터에서 내릴 준비도 시작될 수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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