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태그플레이션 신호"
이미지 확대보기미국 국채시장의 분위기가 불과 몇 주 만에 완전히 바뀌었다. 이달 초만 해도 시장을 지배한 단어는 인플레이션이었다. 10년물과 30년물 국채금리는 20여 년 만의 최고치로 치솟았다. 고유가와 끈적한 물가가 금리를 끝없이 밀어 올릴 것이라는 비관론이 월가를 뒤덮었다.
그런데 10월 22일(현지시간)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섰다. 벤치마크인 10년물 국채금리는 하루 만에 17bp 넘게 급락해 4.972%까지 내려앉았다. 5% 아래로 떨어진 것은 9월 23일 이후 처음이다. 하루 낙폭으로는 2023년 3월 10일 이후 최대다.
2년물 금리도 16bp 넘게 떨어진 4.659%를 기록했다. 30년물은 14bp 이상 하락한 5.296%였다. 단기물부터 초장기물까지 만기를 가리지 않고 금리가 일제히 무너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반등이 아니다. 시장이 바라보는 위험의 성격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공포의 대상이 인플레이션에서 경기침체로 옮겨가고 있다.
■ 유가는 올랐는데 금리가 떨어졌다?
이번 금리 급락에서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유가와 금리가 정반대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이날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은 2.39% 오른 배럴당 99.47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브렌트유는 4% 급등한 113.17달러를 기록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다음 달 3일 중간선거 이후 이란에 대한 "짧지만 집중적인" 공습 재개를 검토하고 있다는 뉴욕타임스 보도가 기름을 부었다.
교과서대로라면 유가 급등은 금리 상승 요인이다. 에너지 가격이 오르면 기대인플레이션이 높아진다. 투자자들은 화폐가치 하락을 보상받기 위해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고, 중앙은행의 긴축 가능성도 커진다. 이달 초 금리가 20여 년 만의 최고치를 찍은 것도 바로 이 경로였다.
그러나 이번에 시장은 유가 급등을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물가 상승 신호가 아니라 성장을 짓누르는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유가 급등은 가계의 실질 구매력을 갉아먹고 기업의 비용 부담을 키운다. 역사적으로도 1973년 석유파동, 1990년 걸프전, 2008년 국제유가 급등은 모두 미국 경기침체와 맞물려 있었다. 배럴당 110달러를 넘는 브렌트유는 그 자체로 경기에 대한 경고음이다.
사우스스트리트증권의 그레고리 파라넬로 미국 매크로전략 총괄은 "미국 소비자들이 확실히 압박을 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 경제를 떠받치는 소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지적이다.
■ AI 불안이 불붙인 위험회피
경기침체 공포를 키운 또 하나의 축은 인공지능(AI)이다. 이날 뉴욕증시는 AI 관련 우려로 급락했다. AI 네트워크 구축에 쏟아붓는 수십억 달러의 투자가 과연 회수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클라이언트퍼스트스트래티지의 미첼 골드버그 대표는 이번 흐름을 "안전자산으로의 도피"로 규정했다. 그는 "사람들이 갑자기 AI 기업들의 채권 발행 규모에 겁을 먹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마저 네오클라우드 수요는 폭발적이지만 자본이 부족하다고 털어놓았다. 수요는 넘치는데 돈이 모자란다는 것은 AI 투자 붐이 신용시장에 크게 기대 왔다는 방증이다. 최근 미국 경제의 주요 성장 동력으로 꼽혀온 AI 설비투자가 자금난에 부딪히면 그 충격은 증시를 넘어 실물경제로 번질 수밖에 없다. 기술주 약세가 단순한 조정이 아니라 성장 동력의 약화로 읽히는 이유다.
카탈리스트펀드의 래리 홀젠탈러는 "오랜만에 국채가 안전자산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기술주 약세와 중동 리스크, 고유가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국채가 다시 피난처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 2년물이 보내는 신호
특히 Fed의 정책금리 전망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는 2년물 금리가 16bp 넘게 떨어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시장이 앞으로의 금리 경로를 낮춰 잡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Fed가 결국 물가보다 경기 둔화 대응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5%라는 금리 수준 자체가 매수세를 불러들인 측면도 있다. 금리가 5%를 넘어서자 3%를 웃도는 인플레이션 위험을 감안해도 매력적인 진입 시점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하루 17bp라는 기록적 낙폭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밑바닥에는 경기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 Fed의 딜레마, 스태그플레이션의 그림자
문제는 앞으로다. 경기침체 공포가 커질수록 Fed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파라넬로는 에너지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Fed가 더 많은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리고 이는 채권시장에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성장은 둔화되는데 물가는 잡히지 않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의 그림자다.
Fed가 경기를 살리려 금리를 내리면 고유가발 물가가 다시 고개를 든다. 물가를 잡으려 긴축을 이어가면 경기 하강을 재촉한다. 1970년대 미국이 빠졌던 바로 그 덫이다. 이번 국채금리 급락은 시장이 이 딜레마의 무게를 본격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앞으로 주시해야 할 변수는 세 가지다. 첫째, 11월 3일 중간선거 이후의 중동 정세다. 이란 공습이 현실화하면 유가는 또 한 차례 급등할 수 있다. 둘째,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안팎의 고공행진을 얼마나 오래 이어가느냐다. 셋째, AI 기업들의 자금 조달 여건이다.국채금리 5% 붕괴는 안도의 신호가 아니다. 경기침체라는 더 큰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이다. 금리가 떨어졌다고 반길 일이 아니라, 왜 떨어졌는지를 직시해야 할 때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