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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詩가 있는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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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은행나무 / 백승훈 시인
가을엔 누구나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드높은 하늘, 금빛 햇살, 청량한 바람, 거리엔 낙엽이 뒹굴고 먼 산 오색단풍이 손짓하는 계절이니 누군들 어찌 시심을 품지 않을 수 있으랴. 옷깃을 파고드는 소슬바람에 마음마저 소슬해지면 나는 습관처럼 방학동 은행나무를 찾아가곤 한다. 600여 년의 긴 세월을 한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은행나무를 보면 내 안에 깃든 쓸쓸함도 이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지기 때문이다. 거기,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가을이 깊어 금빛 은행잎들이 노랑나비 떼가 되어 허공을 날면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정말 ‘나무는 나무랄 데 없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연산군묘 앞, 원당샘 근처에 있는 방학동 은행나무는 가을이면 해마다 시의 옷을 갈아입는다. 세종의 둘째 딸로 한글 창제에 힘을 보탰다는 정의공주묘가 가까이 있는 까닭도 있겠지만 야외 시화전을 하기에 이만큼 멋스러운 장소도 없기 때문이다. 서울시 보호수인 은행나무를 둘러친 담장에 걸린 시화들을 찬찬히 감상하며 은행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지난해 가을, 세상을 떠난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유명한 이생진 시인의 시도 눈에 띈다. 이생진 시인은 방학동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시인이셨다. 이해인 수녀의 시가 나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나의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이해인의 ‘어떤 결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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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은행나무 / 백승훈 시인

백 년도 못 살면서 천 년의 근심을 안고 사는 게 인간이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항상 즐거울 수는 없다.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고 근심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나의 삶을 흔드는 내 안의 분노나 근심이란 것도 잎새에 이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은행나무처럼 폭풍우·눈보라에도 의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화들이 걸려 있는 울타리를 따라 돌며 은행나무야말로 살아있는 시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단풍이 들지 않은 은행나무 곁을 떠나오며 오래전에 가 보았던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를 떠올렸다. 충북 영동의 천태산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23호로 영국사 절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데 수령이 무려 천 년으로 추정되는 노거수다. 높이 30m, 둘레 11.4m에 이르는 은행나무가 금빛으로 물든 가을이면 전국의 시인들이 모여 걸개 시화전을 열고 시 낭송과 노래로 축제를 연다. 내가 그 행사에 참석하던 날, 지금은 고인이 된 가수 이동원이 은행나무 아래서 ‘향수’를 부르던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내 가슴에 선연히 남아 있다. 비 그친 오후, 산허리를 휘감고 있는 비안개를 말아 올리던 소슬바람이 선율에 맞춰 은행잎을 하나둘 흩어 놓던 모습까지.

당분간은 산책할 때마다 은행나무를 찾아갈 것 같다. 걷기가 내가 살아있는 존재라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하는 것이라면, 시를 읽고 시심을 돋우는 일은 내 영혼을 맑고 순수하게 정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화가 걸려 있는 은행나무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는 내내 나는 시를 생각할 것이다. 살아갈수록 시를 쓰는 일이 어렵다. 하지만 시심만은 잃지 않으려고 한다. 수백 년의 세월을 품고도 해마다 새잎을 내고 가을이면 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은행나무를 보면서 내 안에도 시의 샘이 마르지 않길 꿈꾸며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시 한 편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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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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