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이번에 거둔 1분기 성장률 1.7% 성적은 2020년 3분기의 2.2% 이후 5년 6개월 만에 가장 높다. 지난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시작된 중동 전쟁이 성장 하방 압력을 가중했지만 우리 경제는 오히려 더 탄탄한 실적을 올렸다. 그 1등 공신은 단연 반도체이다. 반도체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우리나라 전체 GDP가 크게 증가한 것이다. 반도체를 뺀 나마지 부문에서는 성적이 신통치 않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반도체 착시라는 문제가 생겨난다. 역대급 수출 실적과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화려한 실적 개선은 우리 경제가 마치 탄탄한 회복 국면에 접어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마법의 이면에는 위태로운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지금의 호황은 우리 제조업 전반의 기초체력이 강화된 결과라기보다, 인공지능(AI) 열풍이 불러온 고대역폭메모리(HBM)라는 특수 품목의 단기적 수요 폭증에 기댄 바가 크다. 반도체가 수출 비중의 30%를 차지하는 구조 속에서, 반도체 지표의 호조는 내수 부진과 여타 주력 산업의 경쟁력 약화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가리는 ‘진통제’가 되고 있다. 문제는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졌을 때다. 역사는 우리에게 가장 풍요로운 호황의 끝자락에 가장 처참한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수차례 경고해 왔다.
우리는 30년 전의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95년 대한민국은 반도체 수출 호조에 힘입어 사상 처음으로 수출 1,000억 달러를 돌파하며 샴페인을 터뜨렸다. 하지만 1996년 초, 상황은 반전되었다. 16M DRAM 가격이 개당 50달러에서 불과 1년 만에 5달러 수준으로 폭락한 것이다. 당시 반도체 가격 폭락은 단순한 기업의 수익성 악화에 그치지 않았다. 반도체에 과도하게 의존했던 대한민국 경제 전체에 거대한 하방 압력을 가했고, 이는 경상수지 적자 누적으로 이어져 결국 1997년 외환위기(IMF)의 결정적인 도화선 중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반도체 착시의 비극이다. 기술 혁신이 생산성을 높여 가격을 낮추면, 역설적으로 생산자의 이익이 급감하고 과잉 공급이 발생해 전체 생태계가 붕괴되는 현상이다. 현재의 AI 반도체 호황 역시 공급망이 안정화되고 후발 주자들이 시장에 진입하는 순간, 과거와 같은 급격한 가격 조정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폭풍전야의 고요함을 호황으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위기가 단순한 ‘가격의 문제’였다면 오늘날 위기는 ‘생존의 문제’다. 바로 중국의 무서운 추격 때문이다. 미국과 서방의 강력한 제재 속에서도 중국은 이른바 ‘반도체 자급자족’을 기치로 내걸고 천문학적인 국가 자본을 쏟아붓고 있다.
중국의 전략은 치밀하다. 첨단 미세 공정에서는 다소 뒤처질지 몰라도, 가전·자동차 등에 들어가는 ‘레거시(범용) 반도체’ 시장을 이미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 반도체의 든든한 캐시카우(Cash Cow)였던 범용 제품 시장에서의 퇴출을 의미한다. 더욱 무서운 것은 중국이 HBM과 같은 고부가가치 시장에서도 한국의 핵심 인재를 흡수하고, 국가적 차원의 R&D를 통해 기술 격차를 1~2년 안팎으로 좁히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본의 반도체 신화를 무너뜨렸던 방식 그대로 이제 중국이 우리를 정조준하고 있다. ‘중국은 아직 멀었다’는 안일함은 과거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몰락 전야에 가졌던 태도와 섬뜩하리만큼 닮아 있다.
결국 초격차(Super-Gap)가 핵심이다. 우리는 흔히 ‘초격차’를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른 공정, 조금 더 높은 수율로 이해한다. 하지만 진정한 초격차는 추격자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도 도저히 진입할 수 없는 이른바 기술적 철옹성과 ‘생태계 독점력을 의미한다.HBM의 성공에 취해 있을 여유가 없다. HBM은 결국 ‘메모리의 변주’일 뿐이다. 컴퓨팅 패러다임이 변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판을 짜는 ‘설계자(Rule Maker)’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중국의 물량 공세와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반도체는 이제 기업의 영역을 넘어 국가 안보의 핵심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대응은 여전히 민간 기업의 분투에만 의존하고 있다. 보조금 전쟁을 벌이는 미국, 일본,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각종 규제와 정쟁에 휘말려 골든타임을 허비하고 있다.
정부는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을 위한 인프라 지원은 물론, 파격적인 세제 혜택과 인재 양성 체계를 국가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기업 역시 ‘반도체 착시’에 안주하지 말고, 호황기에 벌어들인 자본을 미래 원천 기술 확보에 공격적으로 재투자해야 한다. 위기는 가장 풍요로울 때, 그리고 내부의 적(안주)이 생겨날 때 시작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반도체 산업은 지금 ‘운 좋게 찾아온 AI 특수’라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났을 때 마주할 현실은 냉혹할 것이다. 가격 폭락의 공포는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으며, 중국의 추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믿을 것은 오직 하나 즉 초격차이다. 과거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초격차의 야성’뿐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가고 도 불가능해 보이는 기술에 도전하며, 위기일수록 투자를 늘렸던 그 결단력이 필요하다. 지금의 호황을 다가올 혹독한 겨울을 버틸 내공을 쌓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대한민국 반도체의 진정한 시험대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