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글로벌이코노믹 로고 검색
검색버튼

[기자수첩] 퇴직연금 500조 시대, '안전'이란 이름의 방치는 끝났다

수익률 좇아 증권사로 향하는 '연금 개미', 머니무브 가속화
증권부 장기영 기자이미지 확대보기
증권부 장기영 기자
퇴직연금이 '잠자는 돈'에서 '깨어있는 자산'으로 변모하고 있다. 과거 은퇴 자산은 그저 안전하게 곳간에 쌓아두는 것이 미덕이었으나 최근 1년 새 우리 국민의 노후자금 운용 철학은 완전히 바뀌었다. 원금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수익률을 좇아 공격적으로 자산을 배분하는 이른바 '연금 개미'들의 거대한 이동, '머니무브(Money Move)'가 현실화된 것이다.

■ 숫자가 증명하는 증권사의 '부각'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 공시에 따르면, 2025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약 496조8033억 원을 기록했다. 1년 만에 약 70조 원이 증가하며 16%라는 가파른 성장을 기록했지만, 시장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업권별 희비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이번 성장세의 주인공은 단연 증권사였다. 지난해 4분기 증권업권 적립금은 131조5026억 원으로 전년 대비 26.5%라는 압도적인 성장률을 기록했다. 반면 '전통의 강자'인 은행은 260조5580억 원으로 15.4% 증가에 그쳤고, 보험사는 104조7427억 원으로 7.4%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보험사의 성장률은 시장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금융권 퇴직연금 시장의 무게 중심이 확정급여형(DB)에서 확정기여형(DC)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전체 DB형 적립금 증가율이 6.68%에 머무는 동안 DC형은 20.28% 급증하며 가입자들이 직접 운용하는 투자형 상품으로 거대한 '머니무브'가 확인됐다. 특히 증권업권은 DC형 증가율 40.48%, 개인형 IRP 증가율 46.00%라는 압도적 성장세를 기록하며 시장의 체질 개선을 주도하고 있다.

■ 수익률 21.4%의 유혹과 '실물이전'의 촉매 역할


자금 대이동을 이끈 엔진은 단연 '수익률'이다. 지난해 4분기 기준 증권사의 DC형 원리금 비보장 상품 평균수익률은 무려 21.4%에 이르렀다. 1년 전(8.8%)과 비교하면 2.4배나 뛴 수치다. IRP 수익률 역시 19%를 기록하며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반면, 안전자산 위주인 원리금 보장 상품의 평균수익률은 3.4%에 머물렀다.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자산 가치는 제자리걸음을 한 셈이다.

가입자들이 '원금 보장'이라는 달콤한 함정에서 벗어나 ETF나 TDF 등 공격적인 포트폴리오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지난해 시행된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도 한몫했다. 기존 상품을 해지하지 않고도 금융사만 갈아탈 수 있게 되면서 수익률에 민감한 스마트 가입자들이 상품 라인업이 풍부하고 매매가 편리한 증권사로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이는, 증권사 전체 적립금 증가율이 은행과 보험을 크게 웃돌며, 수익률 중심의 자금 쏠림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퇴직연금은 단순히 지키는 돈을 넘어 증권사의 다양한 투자 라인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불려 나가는 자산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 '머니무브'가 던지는 경고등…금융권 판도 바뀐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금융권의 판도 변화를 예고한다. 그간 퇴직연금은 고객 접점이 넓은 은행과 장기계약에 특화된 보험사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가입자들이 수익률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면서 브랜드 인지도나 영업점 접근성은 더 이상 결정적인 경쟁력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공은 은행과 보험사로 넘어갔다. 기존 가입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안정성'이라는 방패 뒤에만 숨어있을 수 없다. 자산운용 역량을 강화하고 가입자에게 최적화된 투자 포트폴리오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자산 이탈의 파고를 막아낼 길이 없다. 특히 보험업권의 저조한 성장률은 연금 시장에서 존재감 상실이라는 위기 신호로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

퇴직연금은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최후의 보루다. '머니무브'를 통해 가입자들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한국 금융시장이 한 단계 성숙했음을 의미한다. 500조 원을 넘어 1000조 원 시대를 향해 달려가는 시장에서 금융사들은 이제 '얼마나 많은 돈을 맡았는가'가 아니라 '고객의 노후를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었는가'로 승부를 겨뤄야 한다. 깨어난 개미들의 연금 투자가 '반짝 흥행'이 아닌 '지속 가능한 노후 설계'로 정착되기를 기대해 본다.

장기영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kyjangmon@g-enews.com


[알림] 본 기사는 투자판단의 참고용이며, 이를 근거로 한 투자손실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맨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