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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항공모함의 뱃머리 돌리기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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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길이 330m, 무게 10만 톤이 넘는 니미츠급 항공모함은 최고 속도로 항해 중일 때 키를 최대한 꺾어도 회전 반경이 3㎞, 완전히 방향을 바꾸려면 30분 이상이 걸린다. 방향을 선회할 때 함장은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기관실, 항해사, 레이더실, 함교, 수십 명의 승조원이 동시에 반응해야 하며, 항로 위의 모든 배는 항모의 움직임을 예측하며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국가의 에너지정책도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향하는 가치가 다르니 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건 불가피하지만, 시간이 걸린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전력망, 발전소, 연료공급, 연구개발, 산업 인력까지 모두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정책 방향은 자전거 핸들이 아니라 항공모함의 키다. 지금 방향을 바꾼다면 실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10년 뒤다.

그런데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 거대한 배의 키를 급히 꺾는다. 어느 정부는 탈원전을 선언하고, 다음 정부는 원전 부활을 외친다. 한 정권은 재생에너지 확대를 강조하고, 다음 정권은 석탄과 액화천연가스(LNG)로 돌아선다. 이렇게 5년 주기로 바뀌는 정책을 '국가전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에너지정책은 정치 이벤트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 시스템이다. 산업은 하루아침에 돌아서지 않는다. 기업의 투자, 기술개발, 인력 양성, 인프라 구축은 모두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흔들리면 투자 자본은 떠나고, 기술은 단절되며, 국가 경쟁력은 스스로 잠식된다.
중국을 보라. 2014년 시진핑이 제시한 '에너지안전 신전략'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일관성이 태양광, 배터리, 전기차 산업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 일본도 에너지기본계획을 3년마다 점검하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큰 틀은 유지된다. 독일은 여야 합의로 '에너지전환법'을 제정해 정권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었다.

반면 한국의 에너지정책은 여전히 정치 사이클에 갇혀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정책 불확실성이 재생에너지 투자 비용을 최대 20%까지 높인다고 지적했다. 정책의 신뢰가 무너지면 기술과 자본은 떠난다. 이제는 이 불안정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첫째, '국가에너지전략법'을 제정해 20년 단위의 비전과 목표를 고정해야 한다. 정권은 이 법에 근거한 로드맵을 이행할 의무만 가져야 한다.

둘째, 대통령 직속 '국가에너지안보위원회'를 상설화해야 한다. 정권과 무관하게 전문가·산업계·지자체가 함께 정책의 연속성과 실행력을 점검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광역단체별 '에너지전환 책임관'을 두어야 한다. 각 시·도는 지역 에너지정책의 실행과 성과를 책임지는 전담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 울산처럼 산업과 에너지가 맞물린 도시에서는 수소·전력·인공지능(AI) 기반 분산체계를 관리할 수 있는 지역형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넷째, NESI(National Energy Security Index)를 도입해 각 정부의 정책 일관성과 성과를 수치로 평가해야 한다. 정치가 아닌 데이터가 방향을 결정할 때, 비로소 예측 가능한 국가가 된다.

최근 정부가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산업계의 현실적 요구에 맞춰 조정하기로 한 것도 그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탄소중립의 이상은 중요하지만, 에너지·기술·경제의 현실을 무시한 목표는 항로를 잃은 항공모함과 같다. 현실을 반영한 조정은 후퇴가 아니라 항로 수정이다.

중국의 정책이 부러운 이유는 체제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장기 비전의 일관성과 제도화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도 합의된 목표와 법적 기반이 있다면 충분히 지속 가능한 전략을 세울 수 있다. 항공모함의 뱃머리는 한 번에 돌릴 수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을 급히 틀다 보면, 결국 그 배는 속도를 잃고 표류하게 된다. 정책의 일관성은 추진력을 잃지 않는 기술이며, 예측 가능한 나라가 강한 나라다. 정권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방향이 바뀌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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