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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우중산행(雨中山行) - 빗속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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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산행(雨中山行), 백승훈 시인
비 예보가 있었지만 아침 일찍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섰다. 구파발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북한산성 입구에서 내렸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고, 비안개가 서서히 산허리를 휘감으며 위로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기온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습도가 높아 후텁지근한 전형적인 장마철 날씨였다. 운무에 싸인 북한산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정적이면서도 신비롭다. 수량이 풍부해 물소리가 요란하던 계곡은 그간의 가뭄 탓인지 가늘어진 물줄기가 숨죽여 흐르고, 한껏 짙어진 녹음 속에 꽃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나는 길섶에 개망초와 자주꿩의다리, 각시원추리 정도가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무더운 여름을 건너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더위는 피하기보다는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여름 태양을 능멸하며 피는 능소화처럼 나는 더위를 극복하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산행을 꼽는다. 산행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선택했던 대표적인 피서법이기도 하다. 옛 선비들은 무더운 여름이면 경치 좋은 산을 찾아 학문과 현실을 논하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더위를 잊었다. 다산 정약용이 쓴 '여유당전서'에 나오는 소서팔사(消暑八事·더위를 잊는 여덟 가지 방법)를 살펴봐도 자연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며 더위를 잊는 게 최상의 피서법임을 알 수 있다. 소나무 단 위에서 활을 쏘고, 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네를 타고, 연꽃을 감상하거나 숲에서 매미 소리를 듣는 일 등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음의 여백을 넓혀가면 더위도 저만큼 물러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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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산행(雨中山行), 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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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 코스는 북한산성 입구에서 출발해 계곡을 따라 올라 중성문을 지나 태고사를 거쳐 북한산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용암문을 통과해 하산하면서 도선사를 지나 우이동 만남의 광장에 이르는 약 8.2㎞로 그리 길지 않은 거리의 산행이었다.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과 좋은 사람들과 함께 걸으니 산행의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했다. 날씨가 좋았다면 산영루 누각에 앉아 계곡의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옛 선비들처럼 한담이라도 나누며 세월을 낚는 풍류를 즐길 수도 있었겠지만 습하고 눅눅한 공기 때문에 산을 오르는 발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오후에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와 산을 오를수록 비안개가 발걸음을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서두른 것도 아닌데 이심전심으로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북한산 대피소에서 싸 가지고 온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대피소 아래 용암사 폐사지엔 개망초가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문득 오래전에 보령 여행길에 들렀던 성주사지가 생각났다. 너른 폐사지에 가득 들어찬 개망초 꽃이 물결을 이루며 하얗게 피어 있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농부의 게으름을 비웃듯 묵정밭에 어김없이 들어차던 개망초는 농부의 입장에서 보면 농사를 망치게 하는 잡초일 뿐이지만 그런 선입감을 버리고 바라보면 한없이 정겹고 소담스러운 꽃이다. 개망초를 보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시를 지었던 기억이 난다.

"그대 떠나고 난 뒤/ 나는 굴뚝처럼 외로워져서/ 묵정밭 하나/ 가슴에 품고 산다//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인 줄 알면서도/ 잠시/ 눈길 주는 사이/ 시간은 계절의 발목을 돌아/ 산 밭머리 개망초 하얗게 꽃을 피우고// 주홍부전나비 한 마리/ 개망초꽃 위에 앉아/ 그리움의 빨대를 꽃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나의 졸시 ‘개망초’ 전문

대피소에서 도시락을 나눠 먹는 동안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비옷을 챙겨 입고 용암문을 통과해 하산하면서 푸른 이끼 낀 성벽에 기대어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본다. 안개에 싸여 아스라한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산을 오르는 등산(登山)과 산을 바라보는 망산(望山) 사이엔 엄청난 시각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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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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