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정치학 박사)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에너지 자원과 공급 설비가 국제정치에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공급국 러시아가 가스관을 잠그자, 독일 등 유럽 각국은 에너지 가격 급등과 산업 마비의 위기를 겪었고, 글로벌 물가와 공급망 전체가 흔들렸다.
최대 피해자였던 독일은 이에 대응해 5개월 만에 부유식 LNG 기지를 가동했고, 1년 안에 노르웨이·미국·카타르 등으로 공급선을 다변화했다. 유럽연합은 2027년까지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을 중단하고, 재생에너지 비중과 수소 도입을 대폭 확대하는 구조 전환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은 셰일혁명을 바탕으로 2018년 이후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 2019년부터는 LNG 순수출국이 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외교적 레버리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에너지를 전략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국가만이 새 질서를 설계하고 주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례는 생산 능력 확대 이상의 함의가 있다.
전체 에너지의 94%, 원유의 7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는 한국은 훨씬 더 상황이 심각하다. 호르무즈 해협과 말라카 해협 같은 위험 구간을 통과하는 해상 수송로의 안전이 항구적으로 보장되지 않을 거라는 말이 이렇게도 빨리 현실이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남중국해 산호초에 건설한 중국의 군사기지, 태평양을 동서로 갈라 서쪽을 지배하려는 중국과 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전통 강자 미국이 벌이는 패권 경쟁은 에너지 가격 급등 이상의 심각한 경보를 우리에게 보내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에너지 수급 구조를 가진 나라다.
최근 며칠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란–이스라엘의 충돌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에너지 수송로 안전에 대한 불안 요인 급증 및 글로벌 유가 급등은 한국이 처한 에너지 안보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에너지 공급 안정성은 수요예측, 물량 확보, 가격협상, 운송, 국제협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분야다. 장기 계약이나 공급선 다변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정학 리스크를 감안한 종합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배경에서 ‘국가 에너지안보지수(NESI)’와 같은 정책 도구의 개발이 요구된다. 수입선 집중도, 운송 경로의 군사적 리스크, 공급국의 정치적 변동성 등을 수치화하여 조기 경보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산업부, 외교부, 국정원이 협업해 실시간으로 위험을 판단하고, 외교·무역·인프라 정책에 반영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국가에너지안보지수(NESI; National Energy Security Index)’가 도입되면 해외자원개발, 수입 계약, 인프라 투자 등과 관련된 의사결정이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도가 높아질 것이다. 예를 들어 수입국의 정치 불안, 해상 수송 경로의 군사 충돌 가능성, 에너지원별 국제가격 변동성을 정량화하여 조기 경보를 발령할 수 있다.
이 지수는 정책 당국뿐 아니라 석유와 천연가스 도입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공기업 및 기업에게 실질적인 리스크 관리 도구가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NEIS는 에너지 안보를 재정과 산업정책의 중심축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NESI 지수는 민간 투자자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국가 차원의 에너지 위험도 수치 정보는, 정유·발전 기업뿐 아니라 금융기관, 인프라 투자자에게 예측 가능한 기준을 제공한다. 이는 불확실성 해소와 리스크 프리미엄 완화로 이어져,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장기 투자를 유도할 수 있다. 이 지표의 작성과 이용에 민간이 전략적 파트너로 참여하여 정책의 현장성과 실행력을 높일 수 있다.
미국 상공회의소 산하 에너지연구소(GEI)가 운영하는 ‘에너지안보 리스크 지수(ESRI; Energy Security Risk Index)’를 참고할 만하다. 이 지수는 지정학, 경제성, 공급 신뢰도, 환경 영향 등 4대 분야에 걸쳐 총 37개 항목을 정량화해 점수화한다. 미국은 이 지수를 활용해 에너지 안보 상태를 매년 점검하고, 정책 조정과 투자 유도에 활용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지정학적 격변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 기존 질서는 전쟁으로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은 단순히 ‘에너지 수입선을 다양화하는 대응’에 머물 것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 전략을 설계하는 나라’로 도약해야 한다. 그것이 곧 에너지 안보이고, 산업 경쟁력이며, 지속 가능한 생존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