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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따뜻한 겨울을 위하여

백승훈 시인

기사입력 : 2024-11-2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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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물살이 여울져 흐르는 11월의 끝자락, 창 너머로 보이는 몇 닢 남지 않은 벚나무 잎이 찬 바람에 떨고 있다. 꽃 진 빈자리를 메우며 초록으로 무성하던 잎들이 색색으로 물들어 찬란하던 나무들이 서서히 알몸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겨울이 늦은 탓인지 아직도 초록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도 없진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활엽수는 잎을 떨구고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는 모습이다. 잎이 진 나무들이 쓸쓸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나목의 가지 위에 빛나는 것들, 열매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동네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감나무의 홍시나 모과가 그렇고 숲길에서 만나는 붉은 찔레 열매나 팥배나무 열매, 보랏빛 작살나무 열매들도 우리의 눈길을 끈다. 바야흐로 열매가 아름다운 시절이다.

“한 사내가 죽었다// 세상에 실패하고 주문처럼/ 취생몽사(醉生夢死)를 입에 달고 살더니/ 밤새 참이슬에 흠뻑 젖은 몸/뉘일 자리 찾아 계단을 오르다가/허방을 짚고/ 저승의 문고리를 덥석 잡고 말았네// 하필이면 그날이/ 생이별한 뒤 소식 뚝 끊긴 아들의/ 생일날이었다는 후문// 육십갑자 휘돌아 나오느라/ 상처뿐인 생(生)/ 향 피울 빈소 없어/ 술 한 잔 받지 못하고/ 호곡도 없이 낙엽처럼 흩어져 갈/ 무연고자의 마지막 가는 길// 서녘 하늘 가득/ 비구름이 몰려온다.” -나의 졸시 ‘어느 무연고자의 죽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후배를 생각하며 쓴 시다.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이 파탄 나는 바람에 가족과도 헤어져 홀로 살던 친구였는데 불의의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만취한 채 귀가하던 중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다가 그만 허방을 짚고 굴러떨어졌다. 다행히 이웃 주민이 발견해 119에 신고하여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저마다 빛나는 열매를 내어 달고 한 해의 성과를 자랑하듯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송년회·동창회 등 이런저런 모임이 잦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에 매듭이 있을 리 없으나 사람들은 시간에 눈금을 그어 그동안의 성과를 결산하고 매듭짓길 좋아한다. 팍팍한 일상에 부대끼며 살다 보면 계절이 오고 가는 것마저 잊고 살기 쉽다. 하지만 세모(歲暮)가 다가오면 나무들처럼 자랑스레 내어 달 튼실한 열매가 없다는 사실이 은근히 부끄러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숲길을 걸으며 눈을 찔러오는 빛나는 열매들과 내 안의 빈 바구니를 견주어 보며 일순, 쓸쓸할 순 있으나 그렇다고 낙담할 일은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축복이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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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세월은 가속페달을 밟아대는데 기억은 후진 기어를 넣고 자꾸만 뒷걸음질 친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라. 세월의 속도가 빠르다고 느끼는 것도, 기억이 자꾸만 뒤로 가는 것도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나무들이 알몸으로 세찬 눈보라를 견딜 수 있는 것도 겹겹으로 싸맨 꽃눈이 새봄이 오면 피어날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의 삶이 힘겹다 해도 지레 겁먹고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겨울 가면 봄 오듯, 봄이 오면 새순이 돋고 다시 꽃이 피어나듯 살아있으면 좋은 날은 반드시 찾아오는 게 순리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존 F. 케네디는 “가난한 다수를 도울 수 없다면 부유한 소수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추울수록 온기가 더 그리워지듯이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정이 그리워지는 게 사람이 아닐까 싶다.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정을 나누는 일도 소중하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외롭고 병든 이웃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올겨울은 자신보다 많이 가진 자를 시기하기보다는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정을 나누는 따뜻한 겨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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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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