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미사일·대리세력 요구서 해협 개방 하나로 축소
이란 통제 수용 땐 전략적 굴욕…재확전 땐 유가·선거 부담
이란 통제 수용 땐 전략적 굴욕…재확전 땐 유가·선거 부담
이미지 확대보기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은 지난 5개월 동안 미국이 이란과의 합의에 가까워졌다고 10여차례 밝혔지만 협상은 번번이 무산됐다.
현재 이란과 오만의 협상을 통해 합의가 성사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을 시작하며 제시했던 목표에는 크게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을 공격한 이후 요구해온 조건이 크게 축소됐다며 미국이 군사적 승리와 정치적 비용이 없는 외교적 해결 가운데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5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쟁 초기 이란의 핵 개발 포기, 탄도미사일 생산 중단, 역내 대리세력 지원 철회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이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호르무즈 해협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데 집중돼 있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은 이란의 비핵화가 궁극적인 합의 목표이지만 당장 집중하고 있는 사안은 호르무즈 해협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해협을 다시 개방하는 것만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했던 전쟁 목표를 달성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란은 미국의 공격 이후 호르무즈 해협을 전략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해협 개방을 위해 이란의 통제권을 일부 인정한다면 전쟁으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 이전에는 없던 권한을 이란에 넘겨주는 결과가 될 수 있다.
◇ 비핵화서 호르무즈 개방으로 후퇴
현재 논의되는 합의는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일부를 관리하고 향후 선박에 비용을 부과할 가능성까지 남겨두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과거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 행정부에서 중동 평화협상에 참여했던 애런 데이비드 밀러는 전쟁 이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던 해협이 더 이상 같은 상태가 아니라며 이란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 가운데 이런 현실을 바꿀 조건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미국이 이란에 요구했던 핵 프로그램 폐기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언제든 차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상태에서 미국과 핵 협상에 나서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 초기 요구했던 이란의 무조건 항복과는 거리가 먼 구도다.
밀러는 현재 트럼프 행정부가 일반적으로 승리라고 평가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이해관계의 균형점을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의 부분적인 개방을 성과로 내세울 수는 있다. 그러나 이란의 핵 개발, 탄도미사일 생산, 대리세력 지원을 막지 못한 채 해협에 대한 이란의 권한만 확대된다면 전쟁 이전보다 미국의 전략적 입지가 약화됐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 확전하면 유가·동맹국 피해 커져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을 거부하고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는 방안도 부담이 크다는 관측이다.
전쟁 장기화로 원유 공급 부족 우려가 커졌고 미국의 인플레이션 압력도 높아졌다. 국제유가는 종전 기대가 커진 4일 배럴당 80달러(약 11만5000원) 아래로 내려갔지만 미국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4달러(약 5740원)를 웃돌고 있다.
휘발유 가격은 전쟁 이전보다 약 35% 올랐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경유 가격도 조 바이든 행정부 당시 평균 가격을 넘어섰다.
미국의 미사일 요격체계 재고도 줄어들고 있다. 미국 국민과 동맹국 사이에서는 장기간 계속된 전쟁에 대한 피로가 쌓였다.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마이클 래트니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남은 선택지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공격을 확대하면 중동 국가들이 심각한 피해를 볼 수 있고 국제유가와 세계 에너지 시장도 다시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이란이 해협에 대한 일정한 통제권을 유지하도록 허용하면 걸프지역 동맹국과 미국 납세자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래트니는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뿐 아니라 이란과의 합의를 국내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협상 결과를 미국의 성공으로 포장하는 것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평가다.
◇ 미국 아닌 이란·오만이 협상 주도
호르무즈 해협은 전쟁 이전 세계 원유 공급량의 약 5분의 1이 통과하던 수로다. 전쟁 이후에는 미국과 이란의 가장 중요한 충돌 지점으로 변했다.
현재 협상을 직접 진행하는 당사자는 미국과 이란이 아니라 이란과 오만이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은 이르면 하루나 이틀 안에 해협 개방 합의가 이뤄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란과 오만이 논의하는 조건은 베선트 장관이 언급한 전쟁 이전의 자유로운 항행과는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에스마일 바가이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이란과 오만이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의 향후 관리 절차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잠정 합의는 최종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해협의 진입 항로와 출항 항로를 별도로 관리하는 내용을 담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과 중동 중재국들은 오만을 통해 의견을 전달했고 백악관도 협상 진행 상황을 보고받았다. 하지만 미국이 시작한 전쟁을 완화하기 위한 핵심 협상이 이란과 오만의 주도로 이뤄지는 구도다.
알리 바에즈 국제위기그룹 이란 담당 전문가는 현재 논의가 미국과 이란 사이의 합의라기보다 이란과 오만 사이의 합의라고 평가했다.
밸리 나스르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이란이 해협을 통제하고 있으며 이 문제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이란은 미국의 폭격으로 패배하지 않았으며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 이란 영해로 진입·오만 쪽으로 출항
현재 협상안에 따르면 선박들은 호르무즈 해협에 진입할 때 이란 영해를 이용하고 출항할 때는 대부분 오만 쪽 항로를 이용하게 된다.
합의가 시행되면 이란은 유조선을 포함한 자국 선박을 먼저 통과시켜 항로에 기뢰가 남아 있는지 확인할 계획이다. 이후 다른 상선의 운항을 허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잠정 합의가 유지되는 기간에는 선박에 통행료를 부과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란은 최종 합의가 이뤄진 뒤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서비스 비용을 부과할 권리가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걸프지역 국가들은 이란의 비용 부과 요구에 반대하고 있다.
오만은 동남아시아 말라카해협에서 적용하는 방식과 비슷한 대안을 제안했다. 통행료를 의무적으로 부과하는 대신 비영리단체 등이 항행 안전과 환경 보호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금을 내도록 하는 구상이다.
이 방안이 채택되더라도 이란이 해협의 진입 항로를 관리하고 선박 운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는 남게 된다.
미국으로서는 호르무즈 해협을 다시 열기 위해 이란이 전쟁을 통해 확보한 전략적 지렛대를 일정 부분 인정해야 하는 셈이다.
◇ 한 차례 무너진 종전 합의
FT에 따르면 외교관들은 현재 협상을 통해 지난 6월 17일 미국과 이란이 체결한 양해각서를 되살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당시 양해각서는 4월부터 이어진 휴전을 연장하고 호르무즈 해협을 단계적으로 개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합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란이 오만 연안을 따라 이동하던 선박들을 공격하면서 미국과 이란이 보복 공격을 주고받는 악순환이 다시 시작됐다.
현재 협상에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개방에 합의하면 미국은 이란 항구에 대한 해상봉쇄를 해제하고 이란산 원유 수출 제재를 완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이란이 해협을 부분적으로 개방하는 대가로 자국의 원유 수출을 확대하고 해상봉쇄에서 벗어나는 실질적인 이익을 얻게 된다는 의미다.
미국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과 탄도미사일 생산을 중단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제재 완화와 봉쇄 해제를 제공해야 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을 시작하며 제시한 요구와 비교하면 이란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 백악관 “미 해군이 해협 완전히 통제”
백악관은 미국이 협상에서 밀리고 있다는 평가를 부인하고 있다.
애나 켈리 백악관 대변인은 “호르무즈 해협을 미 해군이 완전히 통제하고 있으며 이란 항구에 대한 미국의 봉쇄로 이란의 역량이 크게 약화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란이 합의에 응하는 것이 현명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란도 알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란은 미국이 해협을 통제한다는 주장과 달리 진입 선박을 자국 영해로 이동시키고 향후 관리 절차를 주도하려 하고 있다.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강조하면서도 이란과 오만의 합의에 기대 해협 개방을 추진하는 상황 자체가 양측의 인식 차이를 드러낸다.
협상안이 이란 지도부의 최종 승인을 받아 실제 합의로 이어질지도 확실하지 않다.
◇ 중간선거 앞두고 국내 정치 역풍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3개월도 남지 않은 미국 중간선거도 부담이란 지적이다.
호르무즈 해협 개방은 국제유가와 미국 내 연료 가격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란의 통제권을 인정하고 제재까지 완화하는 합의는 국내 정치권의 거센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지난 6월 양해각서가 체결됐을 때도 민주당과 일부 공화당 인사들은 조건이 이란에 지나치게 유리하다며 비판했다.
새로운 합의가 트럼프 대통령의 전쟁 목표와 크게 다른 내용으로 발표되면 공화당 강경파와 보수 성향 언론 인사들의 반발도 예상된다.
나스르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현재 군사적으로 승리하기 어려운 동시에 외교적으로 전쟁을 해결하려면 국내에서 정치적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이 공격을 재개하면 유가 상승과 미군 자산 소모, 동맹국 피해가 커질 수 있다. 합의를 선택하면 이란에 유리한 조건을 받아들였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 없이 전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선택지가 거의 남지 않은 셈이다.
◇ 위협·휴전 반복될 위험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 비판에 반응해 다시 군사적 확전을 선택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는 최근 몇 달 동안 이란에 대규모 공격을 경고했다가 외교적 진전을 이유로 실행을 보류하는 모습을 반복했다.
바에즈 전문가는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합의를 정치적 돌파구로 선언한 뒤 비판이 커지면 다시 강압적인 수단을 선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군사적 압박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다시 임시 휴전으로 돌아가는 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핵 개발과 미사일 생산을 포기하고 무조건 항복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5개월이 지난 현재 미국의 최우선 목표는 이란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건 아래서라도 호르무즈 해협을 다시 여는 것으로 축소됐다.
이란과 오만의 합의가 성사되면 국제유가와 해상 운송의 불안은 완화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란의 해협 통제권을 일부 인정하고 봉쇄와 제재를 완화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
합의를 거부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을 확대해야 한다. 이를 선택할 경우 국제유가 상승, 미국 내 물가 부담, 미사일 요격체계 소모, 동맹국의 피로가 더욱 커질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 합의는 이란 전쟁을 끝낼 출구가 될 수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선언할 수 있는 승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전쟁을 시작할 때보다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 트럼프 행정부가 직면한 가장 큰 딜레마라는 지적이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