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년 연간 약 60곳, 올해 들어 12곳 유죄 인정
개인 책임 내세웠지만 기업 임직원 기소도 늘지 않아
개인 책임 내세웠지만 기업 임직원 기소도 늘지 않아
이미지 확대보기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임직원의 불법행위와 관련해 기업을 형사 기소하는 데서 한발 물러서고 있다.
미 법무부는 기업 자체를 처벌하기보다 불법행위에 가담한 임직원 개인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그러나 최근 처리된 주요 사건에서는 기업뿐 아니라 관련 임직원도 기소되지 않았다. 기업 수사를 완화하는 대신 개인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정책이 실제 기소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 법무부가 기업범죄 수사에서 불기소 합의나 기소유예 합의를 활용하고 일부 장기 수사를 종결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고 19일(현지시각) 보도했다.
◇기업 기소 대신 합의로 사건 종결
미 법무부는 최근 중국의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 미국 워싱턴DC 지역은행 이글뱅크, 미국 헬스케어 기업 애보트래버러토리스가 관련된 사건에서 기업을 기소하지 않았다.
수사에 참여한 검사들이 해당 기업의 고위 임원이나 관리자들이 불법행위에 관여했다고 판단한 사건도 포함됐다. 그러나 기업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형사 책임을 묻지 않았다.
연방검사 출신의 에번 바 리드스미스 변호사는 “몇 년 전만 해도 진행됐을 기업 수사와 기소가 지금은 크게 축소됐다”고 밝혔다.
금융회사나 대형 상장기업 입장에서는 형사 기소 위험이 이전보다 줄어든 셈이라는 설명이다.
법무부는 기업들을 쉽게 풀어주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타이슨 듀바 법무부 형사국 차관보는 “올해 처리된 모든 기업 사건이 공개적으로 진행됐으며 특정한 결과를 선호한 것이 아니라 사실과 증거, 법률에 따라 결정됐다”고 밝혔다.
◇올해 유죄 인정 기업 12곳
미 법무부는 지난 수년 동안 연간 약 60개 기업으로부터 연방 형사 혐의에 대한 유죄 인정을 받아냈다.
골드만삭스와 알리안츠글로벌인베스터스, 몬산토, TD은행 등의 계열사나 사업부가 관련된 사건이 포함됐다.
그러나 올해 들어 연방 형사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한 기업은 12곳에 그쳤다.
정유회사 필립스66과 의료폐기물 처리업체 스테리사이클 등 최소 6개 기업은 기소유예 합의를 체결했다.
기소유예 합의는 기업이 위법행위를 인정하고 벌금을 내는 대신 일정 기간 준법 조건을 지키면 법무부가 형사 사건을 종결하는 방식이다. 기업은 경영진 교체나 준법감시 체계 개선 등의 조치를 이행해야 할 수 있다.
◇기업 유죄 판결의 부작용 고려
WSJ에 따르면 기업을 형사 기소하는 것은 법무부가 불법행위를 저지른 회사를 처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 가운데 하나다.
기업의 유죄 판결은 법을 위반하면 공개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경고를 시장에 보낼 수 있다.
반면 기업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하거나 연방정부 계약을 따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기업을 형사 처벌해도 실제 피해는 불법행위에 관여한 경영진보다 주주와 일반 직원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
미 법무부는 이 같은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기소유예 합의와 불기소 합의를 활용하고 있다. 불기소 합의를 체결한 기업은 잘못을 인정하고 벌금이나 몰수금을 내지만 형사 기소는 피할 수 있다고 WSJ는 전했다.
◇"기업 아닌 사람에게 책임 묻겠다"
토드 블랜치 미 법무부 장관대행은 기업 기소 자체를 검찰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기업은 감옥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부패한 임원과 불법행위에 가담한 개인을 처벌하는 것이 재발을 막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논리다.
블랜치 장관대행은 지난해 12월 연설에서 부패한 경영자가 실제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미래의 범죄를 막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업범죄 전문 변호사들은 기업에 대한 처벌이 완화된 만큼 개인 기소가 늘어나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법무부는 불법행위에 가담한 임직원을 확인하고 기소하는 데 협조한 기업에 처벌을 낮춰주는 방식을 활용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기업의 협조를 개인 기소로 연결하는 전략도 이전만큼 강조되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알리바바, 불법 거래 인정하고 불기소
알리바바 사건에서는 수사를 담당한 일부 검사들이 중국 전자상거래업체를 중범죄 혐의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토된 혐의에는 미국 식품의약품화장품법과 통제물질법 위반이 포함됐다.
일부 검사는 알리바바가 유죄를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알리바바는 법무부와 불기소 합의를 체결했다.
알리바바는 의약품과 화학물질, 불법 약물 제조에 사용할 수 있는 알약 압축기 등 2억달러(약 2980억원)가 넘는 불법 거래를 처리했다고 인정했다.
이 회사는 벌금과 범죄수익 몰수금으로 3억2500만달러(약 4840억원)를 지급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기업과 관련 임직원 모두 형사 기소를 피했다.
◇이글뱅크도 형사 기소 피해
법무부는 지난 6월 미국 메릴랜드주에 본사를 둔 이글뱅크에 대한 수사도 형사 기소 없이 종결했다.
이글뱅크는 당시 최고경영자와 사업 관계가 있던 인물의 아들에게 특혜를 제공한 사실을 인정했다.
해당 고객은 계좌에 충분한 자금이 없는데도 수표를 발행할 수 있었다.
은행은 고위 대출 담당자가 건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고객에게 연방정부 보증 대출도 승인했다.
대출금 상환이 제때 이뤄진 것처럼 보이도록 납입 날짜를 실제보다 앞선 날짜로 처리한 사실도 합의문에 포함됐다.
이글뱅크는 불기소 합의를 통해 형사 기소를 피했으며 관련 임직원도 기소되지 않았다.
◇보잉·튀르키예 은행 사건도 종결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보잉에 대한 형사 기소도 취소했다. 보잉은 항공안전 당국을 오도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법무부는 보잉이 2억4300만달러(약 3620억원)의 벌금을 내는 조건으로 불기소 합의를 체결했다.
올해에는 이란 제재를 회피한 혐의로 기소된 튀르키예 국영은행 할크방크에 대한 장기 형사소추도 중단했다.
기업에 대한 형사 판결을 끌어내기보다 벌금과 합의를 통해 사건을 마무리하는 기조가 주요 사건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WSJ는 지적했다.
◇개인 피고인에게도 잇단 관용
기업보다 개인 책임을 강화한다는 법무부의 설명과 달리 기업 임직원에게도 기소유예나 대체 절차가 적용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 1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를 속인 혐의로 기소된 정보기술업체 최고경영자에게 기소유예 합의를 제공했다.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아이넷의 디팍 자인 최고경영자는 증권거래위원회로부터 1070만달러(약 159억원) 규모의 계약을 따내는 과정에서 허위 자료를 제출한 혐의를 받았다.
자인은 존재하지 않는 보안 컨설팅업체가 자신의 데이터센터를 최고 등급으로 평가한 것처럼 꾸민 서류를 제출한 사실을 인정했다.
자인 측은 데이터가 유실되지 않았고 형사사건이 아니라 민사상 분쟁으로 처리했어야 할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오스탈 전 임원 재판도 중단
법무부는 이달들어 호주 조선업체 오스탈의 전직 임원 3명에 대한 형사재판도 중단했다.
오스탈은 2024년 증권사기와 미 국방부의 재무감사를 방해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전직 임원 3명은 사기 혐의로 기소돼 오는 10월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법무부는 이들을 초범 대상 프로그램으로 전환하도록 권고했다. 이 프로그램을 이수하면 형사 혐의를 취소할 수 있다.
기업 기소를 줄이고 개인 책임을 강화하겠다는 법무부의 방침과 달리 회사와 경영진 모두에게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