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봉쇄에 화석연료 수입국 직격…'에너지 자립'이 국가 생존 전략으로
AI 전력 수요·탈세계화 겹치며 1970년대 오일쇼크와 차원 다른 구조적 전환
중국산 태양광·배터리 의존 심화…"새로운 전략적 종속" 우려도
AI 전력 수요·탈세계화 겹치며 1970년대 오일쇼크와 차원 다른 구조적 전환
중국산 태양광·배터리 의존 심화…"새로운 전략적 종속" 우려도
이미지 확대보기메가와트시(MWh)당 14유로(약 2만 4300원) 대(對) 100유로(약 17만 4100원). 같은 날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전력 가격 격차는 국가 에너지 전략의 성패를 숫자로 증명했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약 60%에 달하는 스페인은 독일·프랑스·이탈리아가 100유로를 웃도는 전력 도매가에 신음하는 동안 7분의 1 수준의 가격을 유지했다. 중동 전쟁 재발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고 글로벌 석유·가스 공급망이 붕괴 직전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에너지 안보와 경제 안보가 사실상 같은 개념이 됐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다. 에너지 전문 매체 오일프라이스(Oilprice)는 28일(현지시간) 보도에서 이번 위기가 전 세계 에너지 전환을 과거 어느 때보다 빠르게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미지 확대보기"이번엔 다르다", 구조적 원인 3중주
이번 에너지 전환 가속이 과거 오일쇼크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충격의 원인이 단일 사건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중동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뇌관 아래 ① AI·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폭증, ② 글로벌 LNG 시장의 구조적 공급 부족, ③ 탈세계화에 따른 에너지 국내화 압력이라는 세 가지 구조적 변수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AI 데이터센터가 소비하는 전력은 2026년까지 2022년 대비 두 배 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마이크로소프트·구글·아마존이 수백조 원 규모의 데이터센터 투자를 경쟁적으로 쏟아내면서 전력 수요는 이미 공급 확충 속도를 앞지르고 있다. 이 상황에서 화석연료 의존 발전 시스템은 이중 압박을 받는다. 연료 가격 폭등에 전력 수요 급증까지 겹쳐 공급 여력이 빠르게 소진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세계화 흐름이 에너지 국내화 압력을 가중시킨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이 러시아산 가스 의존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 것처럼, 이번 중동 위기는 아시아 국가들에게 '제2의 우크라이나 모멘트'로 작용하고 있다.
그린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Ember)의 단 월터 수석 연구원은 "1970년대 오일쇼크와 달리 지금은 태양광, 풍력, 전기차라는 검증된 대안이 현실화돼 있다"며 "화석연료 가격 변동성에서 탈피하려는 국가들에 전기차와 재생에너지는 선택이 아닌 합리적 결론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미지 확대보기스페인 모델의 실체. 왜 스페인만 성공했나
스페인의 낮은 전력 가격은 재생에너지 비중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가 지난 26일 브뤼셀 EU 정상회의에서 공개한 수치, 즉 MWh당 14유로 대 100유로 이상이라는 격차가 가능했던 데는 세 가지 복합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는 자연 입지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일조량이 가장 풍부한 국가 중 하나로, 태양광 발전 단가가 구조적으로 낮다. 둘째는 이베리아 반도 전력 시장의 예외적 규제다. 유럽 통합 전력 시장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가스 발전 비용을 전력 가격 산정에서 일정 부분 분리하는 '이베리아 메커니즘'을 한시적으로 적용받아, 가스 가격 급등이 전력 소매가에 곧바로 전이되는 효과를 차단했다. 셋째는 원전과 수력이라는 안정적 백업 전원이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원전과 수력이 메워 주지 않았다면, 낮은 전력 가격 유지는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옥스퍼드대 에너지정책 전문가 얀 로제노 교수는 "스페인은 2019년 이후 태양광·풍력 설비를 두 배로 늘렸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수력과 원전이라는 기저 발전원이 변동성을 흡수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재생에너지, 만능 해법이 아니다
재생에너지 전환이 장밋빛 미래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에너지 안보의 실제 해법은 '재생에너지 확대'가 아니라 '전력 시스템 전체의 재설계'에 가깝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스페인 모델의 취약성은 이미 드러났다. 지난해 4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계통의 불안정성이 원인이 된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고, 약 5000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재생에너지는 기상 조건에 따라 발전량이 급변하는 간헐성 문제를 안고 있어, 전력망(그리드) 확충과 대용량 에너지저장장치(ESS) 구축 없이는 안정적 공급이 어렵다.
이러한 인프라 투자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고금리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태양광·풍력 설비 비용이 올라간 현재, 신흥국은 물론 선진국도 전환 비용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IEA는 2030년까지 청정 에너지 시스템으로의 전환에 연간 4조 달러(약 6052조 원) 이상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추산한다.
BNP 파리바 자산운용(BNP Paribas Asset Management)의 울릭 푸그만 환경전략 부문장은 "화석연료 쇼크로 치러야 하는 기회비용이 재생에너지 전환 투자비보다 크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전력망과 저장 시스템에 대한 선제 투자 없이는 '값싼 전기'라는 열매를 딸 수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반사이익, 그리고 새로운 종속의 딜레마
글로벌 에너지 전환에서 가장 큰 반사이익을 얻는 곳은 중국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 재생에너지 개발국이면서 동시에 배터리, 풍력 터빈, 태양광 패널의 지배적 공급자다. 현재 글로벌 태양광 패널 생산의 80% 이상, 전기차 배터리의 60% 이상을 중국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중동 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의 석유 흐름이 차단되자 글로벌 투자 자금이 중국 친환경 에너지 기업들로 빠르게 유입됐다. 중국 배터리 제조사와 신재생에너지 관련주들은 이달 들어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 중이다.
그러나 이 흐름에는 심각한 역설이 내재한다. 화석연료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국가들이 재생에너지 설비를 확충할수록 중국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구조다. 오일프라이스는 "에너지 자립을 목표로 한 전환이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전략적 종속을 낳을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우려를 전했다.
미국과 유럽이 중국산 태양광·배터리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자국 내 생산 기반 구축에 보조금을 쏟는 것도 이 딜레마에 대한 대응이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유럽핵심원자재법(CRMA)은 모두 에너지 기술 공급망의 탈(脫) 중국화를 겨냥한다. 하지만 단기간에 중국의 생산 규모와 비용 경쟁력을 대체할 수 있는 국가가 없다는 점에서, 서방의 디커플링 전략은 에너지 전환 속도를 늦추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 경제·산업 경고음 커진다
이번 중동 에너지 쇼크는 한국에 특히 가혹하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0%를 웃돌고, 화석연료가 전체 에너지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80%대에 달한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한국이 직면하는 충격은 유럽보다 훨씬 클 수 있다.
반면 기회도 뚜렷하다. 한국의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와 조선업계는 전 세계 에너지 저장 수요 급증과 LNG 운반선 발주 폭발이라는 구조적 수혜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실제로 한국 조선소들은 최근 중동 산유국들과 LNG 운반선 장기 공급 계약을 연이어 체결하며 수주 잔고를 쌓고 있다.
국내 에너지 정책 측면에서는 원전 재가동·신규 건설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동시에 추진하는 '기저 전원 + 변동 전원' 혼합 모델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됐다. 스페인 사례가 보여주듯, 재생에너지 단독으로는 전력 안정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 분야 한 민간 연구소 관계자는 "한국은 원전, 해상풍력, 배터리 ESS라는 세 개의 축을 동시에 강화해야 하며, 그 속도가 곧 산업 경쟁력의 척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현재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2038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32% 수준으로 높이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으나, 전력망 보강 투자와 ESS 보급 속도는 목표치를 하회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전력 계통 안정화를 위한 송배전 인프라 투자를 대폭 확대하는 한편, 미국·유럽의 IRA·CRMA와 연동한 핵심 광물·배터리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서둘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에너지 패권 이동의 신호탄, 지금 무엇을 봐야 하나
이번 중동발 에너지 쇼크는 종전의 공급 충격과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AI 전력 수요 폭증, LNG 공급 구조의 만성적 부족, 탈세계화에 따른 에너지 국내화 압력이 중동 위기와 겹치면서, 에너지 패권의 중심이 석유·가스를 보유한 국가에서 태양광·풍력·배터리·전력망 기술을 보유한 국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스페인의 사례는 그 전환이 추상적 구호가 아닌 MWh당 수십 유로의 실질적 가격 차이로 현실화한다는 점을 입증했다.
그러나 이 전환의 과실을 거두려면 재생에너지 설비 확충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전력망 재설계, ESS 보급, 공급망 탈(脫) 중국화, 그리고 원전을 포함한 기저 전원 확보라는 복잡한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한다. 에너지 안보를 경제 안보와 동일시해야 하는 시대에, 이 과제를 먼저 해결하는 국가가 다음 산업 질서의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