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거부권·미국 지원 중단 겹쳐 키이우 재정 벼랑 끝
4월 헝가리 총선·6월 IMF 심사가 전쟁 판도 가른다
4월 헝가리 총선·6월 IMF 심사가 전쟁 판도 가른다
이미지 확대보기유럽연합(EU)의 153조 원 규모 차관은 헝가리의 거부권에 묶였고, 미국의 직접 지원은 사실상 끊겼으며,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갈등까지 겹치며 키이우의 재정 시계가 오는 6월을 향해 빠르게 달음박질치고 있다. 전장의 총성보다 회계 장부의 적자가 더 위협적인 상황이 됐다.
블룸버그 통신은 27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국내외 당국자들을 인용해, 키이우가 현재 보유한 재원으로는 오는 6월까지만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올해 전체 외부 지원 필요액으로 520억 달러(약 76조 원)를 추산하고 있으나, 주요 지원 경로가 동시다발적으로 차단되면서 재정 붕괴의 공포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군인 급여도 못 줄 판…중앙은행 총재가 꺼낸 '최후의 카드’
우크라이나 재정 위기의 심각성은 중앙은행 수장의 발언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우크라이나 국립은행(중앙은행) 총재 안드리 피시니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국제 자금이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재무부에 직접 대출을 재개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 자금은 군인과 공무원의 급여, 그리고 전시 필수 공공서비스 운용에 쓰인다.
중앙은행이 재무부에 직접 돈을 꿔주는 것은 교과서적 인플레이션 자극 처방으로, 평시라면 어느 나라도 쉽게 꺼내지 않는 비상수단이다. 전쟁 중인 나라의 중앙은행 총재가 이를 공개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사태의 무게를 드러낸다.
우크라이나 의회 재정위원장 다닐로 헤트만체프는 지난달 경제 전문지 포브스 우크라이나와의 인터뷰에서 "현재의 자금 부족이 해소되지 않으면 오는 4월부터 재정 파국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7일 텔레그램을 통해 "자금 부족은 드론 생산과 방공 시스템 구매에 직격탄이 된다"고 공개 호소했다.
드론과 방공망은 현재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공습을 막는 핵심 두 축이다. 이 두 분야의 구매가 막히는 순간, 전선의 균형은 급격히 흔들릴 수 있다.
키이우 당국이 올해 미국산 무기 구매에만 필요하다고 밝힌 금액은 150억 달러(약 22조 원)에 이른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들이 주도하는 미국산 무기 공동 구매 프로그램에도 소수 국가만 비용을 분담하는 실정이다.
우크라이나 주재 나토 대사 알료나 헤트만추크는 블룸버그에 "같은 나라에 계속 손을 내밀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드루즈바 송유관 하나가 153조 원을 막았다
위기의 뇌관은 동결된 EU 차관이다. EU는 지난해 12월 2026~2027년 우크라이나 재정·군사 지원을 위해 900억 유로(약 156조 원) 규모의 차관을 집행하기로 합의했다.
지난해 12월 합의 당시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차관 이자 비용과 상환 책임을 지지 않는 조건으로 반대하지 않았으나, 석유 분쟁이 불거지자 태도를 완전히 뒤집었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러시아에서 헝가리·슬로바키아로 원유를 수송하는 드루즈바 송유관의 복구 및 재가동을 차관 지지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1월 러시아의 공격으로 송유관 설비가 파손됐다는 입장이지만, 헝가리는 우크라이나가 정치적 목적으로 복구를 늦추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지난 2월 23일 브뤼셀 외교이사회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는 우리가 오늘 전하고 싶지 않았던 메시지이자 좌절"이라고 말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키이우에 "어떤 방식으로든 차관을 이행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이후 6주가 지나도록 구체적인 대안은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트 피초 총리도 헝가리가 거부권을 철회하더라도 자국이 이를 이어받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로이터 통신은 유럽 외교관들을 인용해 브뤼셀이 오는 4월 12일 헝가리 총선에서 오르반의 피데스당이 패배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 외교관은 "오르반이 승리하면 EU는 운영 원칙 자체를 바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피초라는 또 다른 변수가 남아 있는 만큼 4월 12일이 곧 해결의 신호탄이 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IMF와의 갈등도 동시에 불거졌다. IMF는 지난달 81억 달러(약 12조 2000억 원) 규모의 4년짜리 지원 프로그램을 승인했지만, 세제 개혁 법안 통과를 선행 조건으로 달았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아직 관련 법안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IMF 미션단장 개빈 그레이가 이끄는 실무팀은 이달 초 우크라이나 의회 지도부를 직접 면담해 이행 의지를 점검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오는 6월 정기 심사 전까지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추가 자금 지급이 중단될 수 있다.
러시아는 오일 특수, 우크라이나 위기가 K방산에 미치는 파장
역설적이게도 러시아는 이 위기에서 반사 이익을 챙기고 있다. 이란 분쟁이 불붙인 국제 유가 급등으로 러시아는 전쟁 비용을 넉넉히 충당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월 취임한 이후 미국의 우크라이나 직접 지원은 사실상 전면 차단된 반면, 이란 사태로 미국의 군사 자원과 외교적 관심마저 중동으로 쏠리며 우크라이나 평화 협상의 동력도 약해지는 구조다.
이 같은 우크라이나 재정 위기는 국내 방산업계에도 복합적인 파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 방산업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정부 정책브리핑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 이후 한국 방산 수출액은 173억 달러(약 26조 원)를 기록하며 사상 최대치를 찍었고, 유럽 국가들의 재무장 수요가 K방산 수출 급등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전쟁이 자금난으로 조기 수습 국면에 들어서거나, 유럽 재정 여력이 우크라이나 직접 지원에 집중적으로 소모될 경우 폴란드·루마니아 등 주요 수출 대상국들의 추가 방산 예산 집행 속도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방산업계 한 관계자는 "유럽의 재무장 예산이 우크라이나 지원에 먼저 투입될수록, 한국산 무기 추가 수주 일정이 뒤로 밀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키이우의 재정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오는 4월 12일 헝가리 총선, 같은 달 워싱턴 주요 7개국(G7) 재무장관 회의, 6월 IMF 정기 심사까지 석 달 안에 세 개의 분수령이 차례로 닥친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키이우에 유리하게 풀리지 않는다면, 우크라이나의 운명은 전선이 아닌 회계 장부에서 먼저 결판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재정 붕괴는 한 나라의 패배를 넘어 서방 집단 안보 체계 전체의 신뢰성이 시험대에 오르는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국제사회가 이 위기를 주시하는 눈길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