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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 리스크와 한국 기업] LG전자 러시아 매출 3년 새 70% 붕괴…하이얼·미디어가 채운 '코리아 빈자리'

2025년 370억 루블·직원 80명 감축…루자 공장 멈춘 LG, '최소 생존 모드' 전환
LG전자의 현지 법인인 'LG 일렉트로닉스 러스(LG Electronics RUS LLC)'의 2025년 연간 경영 실적이 발료되었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0.8% 내려앉은 370억 루블(약 6685억 원)에 그쳤다. 2004년 법인 설립 이후 러시아 가전 시장의 선두를 달려온 LG전자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인 2021년(1200억 루블, 약 2조 1600억 원)과 비교하면 불과 3년 만에 매출이 약 69% 쪼그라든 것이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LG전자의 현지 법인인 'LG 일렉트로닉스 러스(LG Electronics RUS LLC)'의 2025년 연간 경영 실적이 발료되었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0.8% 내려앉은 370억 루블(약 6685억 원)에 그쳤다. 2004년 법인 설립 이후 러시아 가전 시장의 선두를 달려온 LG전자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인 2021년(1200억 루블, 약 2조 1600억 원)과 비교하면 불과 3년 만에 매출이 약 69% 쪼그라든 것이다. 이미지=제미나이3
전쟁이 시장을 바꾼다. 러시아에서 한국 가전 브랜드가 쌓아 올린 20년의 유산이 3년 만에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이 시장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LG전자 경영진 앞에 다시 던져졌다.
러시아 금융·경제 전문 매체 AK&M은 지난 17(현지시각) LG전자의 현지 법인인 'LG 일렉트로닉스 러스(LG Electronics RUS LLC)'2025년 연간 경영 실적을 보도했다.

핵심 지표만 놓고 보면 상황은 냉혹하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0.8% 내려앉은 370억 루블(6685억 원)에 그쳤다. 2004년 법인 설립 이후 러시아 가전 시장의 선두를 달려온 LG전자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인 2021(1200억 루블, 21600억 원)과 비교하면 불과 3년 만에 매출이 약 69% 쪼그라든 것이다.

LG전자 러시아 법인(LG Electronics RUS LLC) 연도별 매출 추이. 도표=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LG전자 러시아 법인(LG Electronics RUS LLC) 연도별 매출 추이. 도표=글로벌이코노믹

반등 신호는 '착시'였다


2024415억 루블(7499억 원)로 반등했을 때 일각에서는 "최악은 지났다"는 시각도 나왔다. 그러나 2025년 수치는 그 기대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매출이 다시 370억 루블로 내려앉으며 2023년 저점으로 회귀한 것이다.

하락의 구조적 원인은 명확하다. LG전자는 한때 루자(Ruza) 공장 가동을 전면 중단했으나, 20253월부터 설비 노후화 방지와 잔여 재고 소진을 명분으로 부분 재가동에 들어간 상태다. 과거 현지 생산 기반 위에서 이뤄지던 완제품·부품 공급이 사실상 차단된 탓에, 지금의 사업 형태는 본사 제품을 들여와 재판매하고 기존 제품에 대한 유지·보수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으로 크게 후퇴했다. 제조 거점을 잃은 기업이 시장에서 낼 수 있는 목소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순이익 25억 루블 유지…'팽창 없는 수익 지키기'


매출 급감 속에서도 순이익은 25억 루블(451억 원)로 전년과 비슷한 수준을 지켰다. 외형은 축소됐지만, 수익성만큼은 방어한 셈이다. 그 배경에는 고강도 비용 절감이 자리한다. LG전자는 지난해에만 현지 인력 약 80명을 감축했다. 광고·마케팅 예산도 36700만 루블(662800만 원)을 덜어내며 지출 구조를 전면 재편했다.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거나 브랜드 존재감을 키우려는 공격적 행보 대신, 남은 비용을 짜내 수익을 지키는 '내부 효율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신흥시장 진출 전략을 연구해 온 국내 경영학계 관계자는 "전쟁으로 서방 제재가 이어지는 시장에서 기업이 취할 수 있는 합리적 선택지는 사실상 두 가지"라며 "완전 철수 또는 최소 비용으로 존재감을 유지하는 것인데, LG전자는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빈자리 파고드는 중국…LG가 잃은 자리를 하이얼·미디어가 채우다


LG전자가 몸을 낮추는 사이, 러시아 가전 시장의 지형도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중국 최대 가전 기업인 하이얼(Haier)과 미디어(Midea)는 서방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발을 뺀 이후 적극적인 유통망 확장에 나서며 점유율을 키우고 있다. 샤오미(Xiaomi) 역시 스마트 가전 라인업을 앞세워 러시아 소비 시장 침투를 가속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지정학적 리스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가격 경쟁력도 갖추고 있어 서방·한국 브랜드가 남긴 시장 공백을 메우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러시아 소비자들이 한국 프리미엄 가전에서 중국 중저가 제품으로 선호가 이동하고 있다는 현지 유통업계의 전언도 LG전자에게는 부담이다.

국내 가전 업계 관계자는 "LG전자가 광고를 줄이고 인력을 감축한다는 것은 경쟁을 포기한다는 의미에 가깝다""당장의 손실을 막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브랜드 인지도 자체가 중국 제품으로 대체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로 프로파일(Low-profile)' 전략의 딜레마


러시아 현지 금융권과 투자 분석가들은 LG전자가 당분간 추가 투자 없이 최소 인력으로 운영하는 '저자세 유지 전략'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한다. 370억 루블이 사실상 러시아 사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저 임계치에 근접해 있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이 전략이 장기화될수록 출구 전략도 복잡해진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인력과 마케팅을 최소화한 상태가 수년간 이어진다면, 설령 지정학적 상황이 개선되더라도 LG전자가 러시아 시장에서 예전의 지배력을 되찾는 데는 수년의 시간과 막대한 재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경쟁자들이 그 공백을 메우고 소비자 충성도를 쌓아가는 동안, LG전자는 시장 안에 있지만, 시장 밖에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셈이다.

삼성·현대와의 온도 차…한국 기업의 러시아 방정식


LG전자의 고민은 러시아에 남아 있는 한국 기업들이 공유하는 숙제지만, 기업마다 처한 온도는 제각각이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과 Neo QLED·OLED 등 프리미엄 TV를 앞세워 러시아 고급 소비재 시장에서 브랜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현지 마케팅 활동도 재개하는 등, 철수보다는 '선택적 영업 지속'을 택한 형국이다. 대형 가전처럼 현지 생산 없이는 가격 경쟁력 유지가 어려운 품목이 아닌 탓에 공장 중단의 직격탄을 상대적으로 덜 맞았다.

현대자동차·기아는 세 기업 중 가장 극단적인 결말을 맞았다. 2023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현지 업체에 매각한 데 이어, 20262월에는 재매입(바이백) 권리마저 최종 포기하며 사실상 러시아 시장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두 브랜드가 떠난 자리는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빠르게 메워 현재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중국 브랜드의 점유율은 약 6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LG전자는 이 두 기업의 중간 어딘가에 서 있다. 주목할 대목은 20253월부터 루자 공장 가동을 부분적으로 재개했다는 점이다. 설비 노후화 방지와 잔여 재고 자재 소진이 명분이지만, 완전한 단절보다는 '실낱같은 연결'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로도 읽힌다. 여기에 더해 'Express Fill' 등 브랜드 상표권을 잇달아 등록하며 사업 재개의 법적 토대를 조용히 다지고 있다는 점은 단순한 생존 유지 이상의 계산이 본사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국내 가전 업계 관계자는 "상표권 등록과 공장 부분 재가동은 철수 직전 기업이 하는 행동이 아니다"라며 "LG전자가 지금 당장은 몸을 낮추고 있지만, 출구 전략보다는 복귀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현대차가 완전 철수를 택했고 그 빈자리를 중국 업체가 장악한 전례를 눈앞에서 본 LG전자로서는, 한발 물러서되 완전히 떠나지 않는 선택이 지금으로선 최선일 수 있다.

글로벌 공급망 전문 컨설팅 업계에서는 "한국 가전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직면한 상황은 단순한 매출 감소가 아니라 사업 모델 자체의 지속 가능성 문제"라며 "전쟁 종결 시나리오가 가시화되지 않는 한, 투자 동결과 인력 감축의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26, LG전자 러시아의 선택지


2026년에도 러시아를 둘러싼 지정학적 불확실성은 해소될 기미가 없다. LG전자가 직면한 선택지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현 수준의 최소 운영을 유지하며 상황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다.

둘째, 추가 감원과 비용 절감으로 수익성을 극대화하며 사실상의 '소리 없는 철수'를 준비하는 것이다. 셋째, 전쟁 종결이나 제재 완화 등 외부 환경의 극적 변화에 대비한 복귀 시나리오를 탁상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3년 전 1200억 루블이던 시장이 370억 루블로 줄어드는 동안, 그 빈자리는 중국 기업들로 채워지고 있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LG전자가 돌아올 자리가 남아 있을지, 지금 이 순간이 그 대답을 결정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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