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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초슈퍼사이클' 한복판에 호르무즈 불길…한국 경제 '에너지 동맥' 끊기나

지난달 역대 최대 수출 251조 원 달성 나흘 만에 봉쇄 직격…비축유 208일치 방어선, 장기전엔 역부족
유가·금리·환율 삼중 압박에 통화정책 셈법까지 뒤집혀…ECB 금리 인상 가능성 40% 돌발 부상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글로벌 에너지·금융시장을 동시에 강타하면서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 기대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글로벌 에너지·금융시장을 동시에 강타하면서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 기대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달 28일(현지시각), 세계에서 가장 좁은 전략 해협 하나가 닫히면서 한국 경제 역대 최고의 수출 성적표가 한순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너지 전문 매체 오일프라이스닷컴은 4일(현지시각) 라보방크(Rabobank) 수석 거시경제 전략가 바스 판 헤펀(Bas van Geffen)이 제로헤지(ZeroHedge)를 통해 배포한 분석 보고서를 인용 보도하며,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글로벌 에너지·금융시장을 동시에 강타하면서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 기대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지난달 28일 이란 본토를 전격 공습('오퍼레이션 에픽 퓨리')한 직후 이란 혁명수비대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선포하면서 하루 2000만 배럴(약 29조 원 상당)에 이르는 세계 원유 공급의 5분의 1이 막혀버렸다.
하필이면 한국이 지난달 반도체 수출 251억6000만 달러(약 36조9000억 원)라는 역대 최대 성적을 쓴 지 나흘 만의 일이었다.

보험료가 해협을 닫았다…물리적 봉쇄보다 무서운 '시장의 자체 검열’


이번 봉쇄의 작동 방식은 과거 어떤 에너지 위기와도 다르다. 이란 혁명수비대가 군함을 동원해 뱃길을 막은 것이 아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지난 2일 해협 통과 금지를 공식 선언했고, 이달 5일부터는 선박 보호보험 가입 자체가 중단됐다.

보험이 사라진 순간, 세계 해운시장이 스스로 멈췄다. 6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보험료 앞에 대부분 선사들에게 해협 통과는 경제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선택이 됐다.

클리어뷰 에너지 파트너스(Clearview Energy Partners)의 공동 창업자 케빈 북(Kevin Book)은 NPR과의 인터뷰에서 "이란이 한 일은 호르무즈 인근에서 드론 몇 기를 띄운 것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로 보험사와 해운사들이 스스로 항로를 포기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RBC캐피털마켓의 원자재 전략 총괄 헬리마 크로프트(Helima Croft)는 같은 인터뷰에서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1970년대 오일 엠바고 이후 최대의 에너지 위기처럼 보인다" 고 말했다.

한국해양진흥공사가 이달 4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달 2일 기준 호르무즈 해협 통과 물동량은 평시 대비 약 80% 급감했다. 대형 원유 운반선(VLCC)의 중동~중국 노선 운임은 지난달 13일 대비 3.3배 치솟았으며, 통항 제한이 한 달간 이어질 경우 국내 원유 도입 약 40항차, LNG 약 8항차의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 달에 원유 40척, LNG 8척이 막힌다는 수치는 숫자가 아니라 정유공장 가동률, 발전소 연료 재고, 석유화학 공장 원료 수급으로 직결되는 현실이다.

반도체 '초슈퍼사이클'을 위협하는 에너지 원가 폭탄

지난달 한국 수출은 674억5000만 달러(약 94조8000억 원)로 2월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반도체 수출은 전년보다 160.8% 늘어난 251억6000만 달러로 전체 수출의 37.3%를 차지하며 역대 최고 비중을 나타냈다.

그런데 이 눈부신 성적표 뒤에 구조적 약점이 숨어 있다. 반도체는 전력 다소비 산업이다. 산업용 전기요금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연료비 급등 여파로 7차례에 걸쳐 약 70% 인상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인공지능(AI) 수요 확대에 맞춰 생산을 늘리고 있어 전력 사용량도 증가하는 추세인데, 전기요금이 추가로 오를 경우 비용 부담은 더욱 커진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반도체 측정·검사기기, 브롬·헬륨 등 중동 의존도가 높은 14개 품목에 대해 공급망 차질 대응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반도체 제조용 검사부품·장비는 미국으로부터 대체 수입이 가능하고, 브롬 등 일부 정밀화학제품도 국내 생산, 재고 활용, 수급 대체 등을 통해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정부는 밝혔다.

정부는 호르무즈 해협 이용 비중이 54%에 달하는 수입 나프타에 대해 업계와 협의해 수출 물량의 국내 전환 및 대체 공급망 확보에 나서기로 했다. 나프타는 석유화학의 핵심 원료로, 공급 차질 시 나프타 가격 상승이 석유화학을 넘어 자동차·반도체 등 전방 산업까지 원가 연쇄 상승으로 번질 수 있다.

미국 싱크탱크 스팀슨 센터(Stimson Center)의 제임스 김 한국프로그램 총괄은 "분쟁이 길어지면 한국은 전력 공급 유지뿐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역량에도 상당한 영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국회예산정책처도 석유 공급이 5%만 줄어도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0.6%포인트 하락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금리 인하 기대 붕괴…ECB 인상 가능성 40%, 한국 통화정책도 기로


에너지 위기는 실물경제를 넘어 전 세계 통화정책의 방향판까지 돌려놓고 있다. 오일프라이스닷컴이 경제분석가 바스 판 헤펀의 말을 인용, 전 세계 단기금리 선물시장은 통화 긴축 쪽으로 급속히 재조정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잉글랜드은행은 당초 예상보다 금리 인하 횟수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시장 기대가 꺾였고, 유로존 단기금리 시장에서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연내 금리를 오히려 올릴 가능성이 40%가량 반영되기 시작했다.

지난달 유로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1.9%로 ECB 목표치(2%)를 소폭 밑돌았으나 시장 예상치 1.7%를 웃돌았다. 라보방크는 최근 에너지 가격 상승분이 유로존 물가를 0.5%포인트 추가로 끌어올릴 수 있어 올해 연간 물가 상승률이 ECB 목표치를 넘어서는 2.3%에 이를 수 있다고 추산했다.

브렌트유는 지난 2일 배럴당 80달러(약 11만7000원)까지 치솟으며 이틀 만에 11% 올랐고,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메가와트시(MWh)당 30유로(약 5만1000원)에서 60유로(약108만2000원)를 웃도는 수준까지 두 배 가까이 급등했다가 48유로(약 8만 원) 선으로 소폭 내렸다.

JP모건 등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봉쇄가 더 길어지고 충돌이 확산될 경우 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130달러(약 17만6000~19만 원)를 돌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증권업계에서는 "에너지는 국가 경제와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으로, 에너지 가격 상승은 필연적으로 소비와 투자 위축으로 이어진다"며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유럽이 겪었던 에너지 부족 사태를 아시아와 유럽 국가 모두가 겪을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금융시장에서 '피난처'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달 3일 코스피는 7.24% 급락하며 5800선이 깨졌고, 원·달러 환율은 1500원선을 돌파했다. 이틀 뒤 한국 코스피는 12% 폭락해 글로벌 증시가 아직 바닥을 확인하지 못했음을 알렸다. 전통적 안전자산인 금조차 이번 주 초 장중 최고가에서 5% 하락했으며, 달러 유동성 확보가 시장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비축유 208일치는 시간 벌기…진짜 싸움은 '봉쇄 장기화' 국면


한국 정부는 이달 3일 관계 부처 합동 긴급 대응 회의를 열고 정부 비축유 7640만 배럴, 민간 비축유 7380만 배럴에 3개월 안에 추가 확보할 물량 3500만 배럴을 더하면 합산 208일치에 해당한다며 당장의 수급 대응력은 충분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208일은 절대 안전의 숫자가 아니다. 해운업계에서는 이번 사태의 전개 방향을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나눈다.

미국과 이란 간 협상을 통한 조기 관리 국면 진입, 이란의 제한적 보복에 따른 부분 봉쇄 장기화, 역내 전면전으로의 확전이 그것이다. 학계에서는 "이란의 절대적 권위자가 사라지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한 만큼 사태가 예상보다 길어지고, 호르무즈 해협 봉쇄 역시 장기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봉쇄가 길어질수록 한국 경제가 치러야 할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달러 오를 경우 연간 약 100억 달러(약 14조6000억 원)의 수입 증가 요인이 발생하는데, 이는 지난달 사상 최대 무역흑자 155억 1000만 달러(약 22조7000억 원)의 절반을 훌쩍 웃도는 규모다.

반도체 초슈퍼사이클이 쌓아 올린 무역흑자가 에너지 수입 급증으로 상쇄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가 가계·기업 충격 완화를 위해 에너지 보조금 지원에 나설 경우 이미 빠듯해진 재정에 추가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점도 변수다.

세계 최대 수출국들이 몇 주 안에 이 해협의 재개통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아니면 한국이 처음으로 '호르무즈 없는 에너지 공급망'을 설계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될지, 그 답은 지금 이 순간도 페르시아만에서 쓰여지고 있다.


서진욱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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