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원전 기업·싱가포르 정부 기관 간 사상 첫 원자력 협력 약정… 이재명 대통령 국빈 방문 계기로 성사
싱가포르, 38억 달러(약 5조 원) 에너지 펀드 앞세워 SMR 도입 공식 타진… 웨스팅하우스·롤스로이스도 노리는 '황금 시장'
싱가포르, 38억 달러(약 5조 원) 에너지 펀드 앞세워 SMR 도입 공식 타진… 웨스팅하우스·롤스로이스도 노리는 '황금 시장'
이미지 확대보기싱가포르 환경·에너지 전문매체 에코비즈니스의 3일(현지 시각) 보도에 따르면, 이번 협약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급증으로 심화된 싱가포르의 전력 수급 위기를 배경으로, 한수원이 2030년대 중반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 중인 한국형 혁신 소형모듈원자로(i-SMR)를 앞세워 동남아시아 원전 시장 선점에 나선 것이다.
왜 지금, 왜 싱가포르인가…AI가 쏘아 올린 전력 위기
이번 MOU를 이해하려면 먼저 싱가포르가 처한 에너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서울 면적의 약 1.2배에 불과한 이 도시국가는 태양광을 대규모로 설치할 땅도, 대형 원전을 지을 부지도 없다. 전력의 절대량은 수입 천연가스에 의존한다.
문제는 AI 데이터센터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메타의 아시아·태평양 거점이 밀집한 싱가포르는 AI 인프라 확장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해 발표한 '전기 2024년-중반부' 보고서에서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2030년까지 연간 약 945테라와트시(TWh)로 지금의 두 배 이상 불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블룸버그NEF는 2035년까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현재 40기가와트(GW)에서 106GW로 세 배 가까이 뛸 것이라고 내다봤다.
싱가포르 정부가 미래 에너지 전략으로 제시한 네 가지 방향은 태양광, 역내 전력 수입, 저탄소 수소, 첨단 원자력(SMR 포함)이다. 이 가운데 재생에너지는 좁은 국토로 용량 확장에 한계가 뚜렷하고, 수소는 대규모 상용화까지 갈 길이 멀다.
역내 전력 수입은 지정학적 변수에 노출된다. 기저 전력의 안정적 확보라는 과제를 풀 현실적 열쇠로 SMR이 떠오른 구조다.
콕 키옹 푸아 EMA 청장은 MOU 체결 직후 "국내 에너지 자원이 매우 제한적인 소규모 국가에 저탄소 전환 과정에서 에너지 안보와 회복력을 강화할 모든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은 필수적"이라면서 "첨단 원자력 기술은 청정에너지원으로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한수원과의 협력은 SMR에 대한 우리의 역량과 기술적 이해를 한층 강화하고, 원자력의 적합성을 더욱 신중하고 엄격하게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싱가포르 정부가 이미 SMR 연구개발·규제 체계 정비, 국제 협력 지원 목적으로 미래에너지 정책펀드에 38억 달러(약 5조 원)를 배정했다는 사실은 이 나라가 '검토 중'이 아니라 '진입 준비 완료'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말해준다.
한수원 i-SMR, 싱가포르 진입 교두보 확보…그러나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한수원은 EMA가 SMR 기술의 안전성과 타당성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책임 있는 파트너로 적극 협력하며, 우리의 기술과 경험이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지도록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그러나 싱가포르 시장을 겨냥한 눈은 한수원 혼자가 아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2024년 SMR 카탈로그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상세설계 단계까지 진입한 SMR 노형은 17개에 이른다.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AP-300, 영국 롤스로이스의 470㎿급 가압 경수로, 미국 테라파워의 나트륨 냉각로 등이 2030년대 초 상용화를 목표로 시장 선점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수원 i-SMR의 상용화 목표 시점은 2035~2036년으로, 일부 경쟁 모델보다 일정이 뒤처진다. 이 점은 MOU 체결에서 실제 수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수원이 넘어야 할 현실적 장벽이다.
원전 업계에서는 "MOU 체결 자체보다 타당성 조사와 노형 평가 과정에서 경쟁사 대비 어떤 기술적·경제적 차별점을 제시하느냐가 최종 수주를 가르는 관건"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원전 업계 관계자들은 이번 협약을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체코 두코바니 프로젝트에 이은 한국 원전 수출의 세 번째 교두보 구축 시도로 보는 분위기다. 한국은 지난해 약 24조 원 규모의 체코 원전 사업 수주전에서 승리하며 글로벌 원전 수출 경쟁력을 재확인한 바 있다.
FTA 20주년 맞아 통상도 격상…협력 무게중심 에너지로 이동
SMR MOU 체결과 함께 양국은 한-싱가포르 자유무역협정(FTA) 개선 협상 개시에도 합의했다. 싱가포르는 한국이 아세안 국가 가운데 처음 FTA를 맺은 나라로, 올해 협정 발효 20주년을 맞았다.
지난해 양국 교역 규모는 309억 달러(약 45조 원)에 이르러 2022년 이후 다시 300억 달러 선을 웃돌았다. 개선 협상은 바이오·제약 공급망과 탈탄소 분야를 중심으로 기존 규범을 현대화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이번 MOU 성과가 실질적인 사업·프로젝트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원전 도입에 오랫동안 신중한 태도를 견지해온 싱가포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동남아 에너지 지형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AI가 전력망을 뒤흔들고 탄소중립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는 지금, 싱가포르가 어떤 SMR 노형에 최종 도장을 찍느냐는 한국 원전 산업의 다음 10년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서진욱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