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ZF '2.6조 빅딜'이 쏘아 올린 신호탄… "제조업 한계, 전장(電裝)으로 뚫는다"
이미지 확대보기내연기관 기술로 지난 100년을 지배해온 독일 '기계공학'의 자존심이, 반도체와 소프트웨어로 무장한 한국 '전자산업'의 자본력 앞에 무릎을 꿇은 상징적 장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투자는 스마트폰과 가전 시장의 성장 정체(Peak-out)에 직면한 한국의 4대 그룹(삼성·LG·현대차·SK)이 '바퀴 달린 전자제품'인 미래차 시장으로 거대한 자본 이동을 감행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본지는 삼성의 대형 인수합병(M&A)을 계기로 한국 기업들이 그리는 미래 모빌리티의 큰 그림과 그 이면에 숨겨진 전략 그리고 냉정한 대외적 현실을 분석했다.
4대 그룹, 미래차 'A to Z'를 분할 점령하다
현재 한국 대기업들의 전장사업 투자는 각 그룹의 주특기에 맞춰 철저하게 분업화·전문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우선 삼성전자는 차량의 '두뇌(Brain)'를 장악하려고 한다. 삼성의 전략은 명확하다. 차량의 중앙제어장치, 즉 '두뇌'를 제어하는 것이다. 하만(Harman) 인수 후 디지털 콕핏(인포테인먼트) 시장을 선점한 삼성은 이번 ZF ADAS 사업부 인수로 가장 취약했던 '눈(센서)'과 '판단 능력(주행 SW)'을 확보했다. 이로써 삼성은 반도체(엑시노스 오토)-센서(ZF 카메라)-인포테인먼트(하만)로 이어지는 완벽한 자율주행 솔루션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다음으로 LG전자는 이동 공간을 '경험(Experience)'으로 채우려고 한다. LG전자는 자동차를 '집의 연장선'으로 정의했다. VS사업본부는 단순 부품 납품을 넘어 차량용 OS(WebOS)를 통해 콘텐츠를 제공하는 플랫폼 사업자로 진화 중이다. 현재 100조 원이 넘는 수주 잔고는 LG의 전략이 시장에서 통했음을 증명한다. 모터와 인버터 등 구동계(LG마그나)부터 차량용 조명(ZKW), 인포테인먼트까지 LG는 차량 내부의 '모든 경험'을 설계하고 있다.
SK그룹도 인공지능(AI)의 '신경망(Network)'과 '기억(Memory)'을 미래 먹거리로 사업화하고 있다. SK는 자율주행차가 쏟아내는 막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인프라에 집중한다. SK하이닉스는 차량용 고대역폭메모리(HBM)와 LPDDR5T 등 고성능 메모리 시장을 장악하며 '달리는 AI 서버'의 기억장치를 담당한다. 여기에 SK텔레콤과 합병 법인 리벨리온(사피온)은 국산 AI 반도체(NPU)를 통해 저전력 고효율 연산 처리를 지원하며 모빌리티 생태계의 신경망을 구축하고 있다.
자동차 거인인 현대차그룹은 '제조(Body)'를 넘어선 '파운드리' 전략을 구사 중이다. 현대차는 최근 구글 웨이모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자율주행 파운드리(수탁생산)'라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의 난항 속에서 검증된 하드웨어 제조 능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로보택시 기업들에 최적의 플랫폼을 제공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택했다.
왜 지금인가? '독일의 위기'와 '한국의 기회'
한국 기업들의 광폭 행보는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구조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첫째, '기술적 차익거래(Technological Arbitrage)'의 실현이다. 전기차와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 전환으로 인해 자동차 부품의 70%가 전장 부품으로 대체되고 있다. 보쉬, 콘티넨탈 등 전통적 부품사들이 기계에서 전자로 전환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치르며 구조조정(보쉬 1만3000명 감원 발표)에 허덕이는 동안, 이미 모바일과 가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 기술을 보유한 한국 기업들은 무혈입성 할 기회를 잡았다. 삼성의 ZF 인수는 이러한 '유럽의 위기'를 '한국의 기회'로 바꾼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 지정학적 반사이익(Geopolitical Moat)이다. 미·중 갈등으로 인한 공급망 배제 조치는 한국 기업에 날개를 달아줬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은 "서구권 완성차업체들에 한국은 중국의 저가 공세를 막아내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유일한 대안(Pragmatic Alternative)"이라고 평가한다. 배터리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까지 '비중국(Non-China)' 공급망을 완벽하게 갖춘 국가는 한국뿐이다.
제약요인, 여전한 '소프트웨어' 갈증
그러나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냉정하게 볼 때 한국 전장사업은 하드웨어 제조 경쟁력에 치우쳐 있다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소프트웨어(SW) 역량의 부재다. 현대차그룹의 SDV 전환을 이끌던 송창현 사장의 최근 사임은 전통 제조업체가 실리콘밸리식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변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삼성과 LG 역시 하드웨어와 미들웨어에는 강하지만, 테슬라의 완전자율주행(FSD)이나 구글의 운영체제(OS) 생태계와 같은 독자적인 '킬러 소프트웨어'는 부족하다. 삼성(하만)과 LG(VS사업본부)가 인포테인먼트와 통신 모듈(텔레매틱스) 시장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지만 이는 하드웨어와 미들웨어 중심이다. 차량 전체를 제어하는 OS나 자율주행 알고리즘(FSD급) 등 고부가가치 데이터 비즈니스로의 확장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결국 하드웨어 공급사에 머물며 부가가치를 뺏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빅테크 종속 심화 우려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퀄컴과 엔비디아의 차량용 칩셋 지배력은 절대적이다. 삼성전자가 엑시노스 오토를 밀고 있지만, 프리미엄 시장은 여전히 퀄컴 스냅드래곤이 장악하고 있다. 핵심 두뇌(AP)를 외국산에 의존할 경우 한국 전장기업들은 단순한 조립 생산자(Assembler)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글로벌 경쟁력 비교와 해외 평가 "한국은 유일한 대안"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경쟁국들의 상황과 맞물려 한국 기업들이 반사이익과 기술적 우위를 동시에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전통 자동차 강국인 독일(보쉬·콘티넨탈)과 비교해 한국 기업은 '속도'와 '전자 DNA'에서 앞선다. 독일 기업들이 내연기관 인력 구조조정과 부채 문제로 허덕일 때 한국 기업들은 과감한 투자와 M&A로 기술 격차를 벌리고 있다. 이번 ZF의 ADAS 매각은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이 독일의 기계공학에서 한국의 전자공학으로 넘어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또한 글로벌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퀄컴·엔비디아)은 가장 강력한 경쟁자다. 엔비디아는 AI 학습과 고성능 자율주행 칩에서, 퀄컴은 콕핏 칩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린다. 삼성은 하만과 ZF의 통합 솔루션으로 '칩 단품'이 아닌 '전체 시스템'을 제안함으로써 틈새를 공략해야 한다.
떠오르는 전기차의 황제인 중국 기업들(화웨이·샤오미 등)은 거대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무섭게 성장 중이다. 하지만 미·중 무역 분쟁과 데이터 보안 이슈로 인해 북미와 유럽 시장 진입이 제한적이다. 이는 한국 기업들에 '지정학적 방어막(Geopolitical Moat)'으로 작용하며, 서구권 OEM들에 한국 기업은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주요 해외 매체와 연구소들은 한국 기업들의 약진에 주목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주요 투자은행(IB)들은 한국의 배터리와 전장 부품업체들을 미·중 갈등의 최대 수혜자로 분석한다. 특히 미국 정부의 '해외우려기관(FEOC)' 규제로 중국산 부품 사용이 제한되면서 테슬라와 GM 등 글로벌 OEM들이 한국 기업을 ‘가장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대안’으로 선택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시장조사기관들은 삼성의 ZF ADAS 인수에 대해 "디지털 콕핏과 ADAS가 융합되는 중앙 집중형 제어기 시장(2035년 1270억 달러 전망)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적 교두보"라고 호평했다. 현대차의 웨이모 파트너십에 대해서도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 실패의 리스크를 줄이고, 하드웨어 강점을 극대화하는 영리한 전략"이라는 긍정적인 분석이 지배적이다.
'패스트 팔로어'를 넘어 '룰 세터'로
2030년 글로벌 SDV 시장은 1조6000억 달러(약 2330조 원) 규모로 폭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의 ZF ADAS 인수는 한국 대기업들이 더 이상 시장의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에 머물지 않겠다는 선전포고다.
업계에서는 향후 전장 시장이 '통합' 싸움이 될 것으로 본다. 개별 부품을 잘 만드는 것을 넘어 반도체-소프트웨어-디스플레이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완성차업체에 '턴키(Turn-key)'로 제공하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삼성의 '통합 솔루션', LG의 '차량용 OS 플랫폼', 현대차의 '자율주행 제조 플랫폼'은 모두 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미래 한국 전장사업의 성패는 '이종 결합'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 제조업의 DNA에 AI와 소프트웨어를 얼마나 빠르게 이식하느냐가 관건이다. 독일이 주춤하는 사이 한국은 모빌리티 산업의 새로운 규칙 제정자(Rule Setter)가 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맞이했다. 삼성과 LG, 현대차, SK의 도전은 한국 경제가 '반도체 외발 통행'에서 벗어나 '모빌리티'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성장 엔진을 장착할 수 있을지를 결정짓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